Ex Machina - 굴뚝 청소부



  당 영화의 백미 하면 단연 케일렙이 자기 의심에 빠진 이 대목이다. 에이바에게 너무 빠진 나머지 그 인공지능 로봇과 연애하는 상상까지 했었고, 단지 영어 못하는 시녀인 줄로만 알았던 쿄우코마저 로봇으로 드러나는 바람에 자신 역시 네이던이 개발 중인 시제품이 아닐까 의심한다. 주인공 케일렙은 튜링 테스트를 당하는 기분에서 도저히 헤어나올 길이 없어 우선 눈을 까뒤집고 구강 점검에 이어서 면도날로 전완 피부를 그어 피하 조직이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지 검사하려 했다. 데카르트식 악마의 21세기식 재림이다.

[1]
  시대정신의 아들답게 케일렙은 어딘지 이상하면 우선 몸으로 확인한다. 갈라진 살갗 사이로 빠알간 피가 줄줄 나오는 걸로 보아 적어도 뇌가 혈액 순환계를 의지한다고 판단한다. 피를 천연 생명의 직유라고 즉감해야 하는 지경이고, 그리라도 안 했다간 돌아 버릴 것만 같다. 이 즉각적인 판단이 유구한 성혈 신앙의 곁뿌리인들 어떠랴. 적어도 모기들이 그냥 지나갈 몸은 아닌 것이다. 일단 그는 스스로 인간임을 확신하고 본다. 자신이 여전히 고깃덩어리구나 싶고 그러므로 사람이구나 싶다.


  길고 지난한 발육 과정을 거친 육신인 게 을매나 다행스러운 일인지 애초에 자아의 정통성을 그리 확보해 보려는 시도 자체부터가 가히 인간답지 아니한가. 그렇게 케일렙은 자신을 제삼자화해 본다. 마음 같아선 눈도 파 보고 배를 갈라 미끌미끌하고 물컹한 내장도 만져 보고 싶었으나 불행히도 복부에 지퍼가 달려 있진 않다. 출혈 과다는 피하고 볼 일이다. 아니, 그런 치명상을 염려하고 목숨만은 걸지 않으려 팔뚝을 조심조심 살짝 긋는 소심함부터가 벌써 인간적이지 아니하냐. 이게 어디 감히 로봇 같은 게 느낄 공포심이냐. 이 대견스러운 자기 성찰에 모종의 안도감을 느끼고 나니 마음이 한결 낫다. 그리고 그는 가만히 거울을 들여다본다. 앞에 째려보는 눈이 있다. 지랄도 가지가지라고 말하는 표정이다. 그래 내가 잠시 미쳤긴 했지, 라고 케일렙은 자가 진단한다. 확인은 끝났다. 이제 서서히 새 사람으로 거듭나는 기분이다. 그렇다고 소심을 넘어 타의적 핸들링을 초극할 사적 선택의 자유가 지금 막 새삼 탱천하는 듯 비대해지는 것은 아니었다.

[2]
  그는 다시금 의심에 빠진다. 가벼운 자해 수순을 밟는 그 소심한 정도의 행동 형식으로 부족하나마 째진 살과 붉은 액체의 의미론을 마음에 논하지만, 소심한 형식은 소심한 내용을 결정짓는 법이다. 인간이거나 아니거나 따져 봐야 양자택일이고, 소심한 자해의 규모가 그가 이미 정한 소심한 뜻의 규모였으니 택일의 결국은 '인간'이다. 그에겐 이 선택이 소심해서 자기가 인간이라고 정한 근거였다. 인간이고 싶은 마음이 낳은 편향적 선택이라 하는 것 자체가 인간의 증명 아닌가. 그러나 애당초, 그가 사는 세상이 생물계와 디지털계의 간극과 단절이 융합의 기로를 이미 맞이했는지 어떤지 방금까지도 그의 무의식조차 안 건드리던 오싹한 질문이었다. 자신이 네이던의 음흉한 손에 소심한 캐릭터로 설정된 인공지능이면 어쩔 건가. 혼자서 뭔가 사부작사부작 만들고 있던 그자의 조용한 혁신이 거기까진 안 갔으리라는 단정은 단정의 형체조차 없던 전제였건만 혹시나 하는 마음이 이젠 의식 표면에서 부유하더니 앞서 내린 판단을 시커멓게 뒤덮기 시작한다. 인간만이 할 수 있다던 숭고한 자기 반성적 의혹마저 설마 디지털계로 넘어갔을 리 없다는 불문을 암귀 같은 의혹이 집어삼킨 것이다.

  사고로 죽은 엄마 아빠는 실재했는가. 거울 속의 요 비실비실하고 창백한 놈이 과연 인간인가. 보이는 것은 보고 싶은 믿음의 프로그램이 회수하는 유사 자기 증명인가. 자신은 에이바에 대해 튜링 테스트 역을 하는 차세대 남장 에이바가 아닐까. 아~ 씨발, 모든 것이 온통 인공지능이 엮고 짜는 매트릭스 속의 직조물일 것 같기만 하다... 이리하여 케일렙은 자기 의혹이 가당한 그 사변적인 수준에서 자고로 양도할 수 없다던 그놈의 인간미를 확보하려다 실패한다.


  이제 이판사판이다. 그 과정이 개미지옥 같다 한들 어떠하며 그 막판이 눈알을 파 내고 배를 가르는 꼴인들 어떠하랴. 할 수 있는 건 단계적으로 다 해 보는 게 인간답지 않은가. 죽어도 인간답고 비장하게 인간의 형식으로 죽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하여 그는 자기 의혹에 상당하는 부분적인 신체 점검으로 인간성이 가능할 것 같으면 우선은 배를 안 째고도 인간임을 확인하는 길을 생각하기 시작했고, 솔직히 그것은 면도기에서 면도날을 뜯어내던 중에 이미 문득 떠오른 방법이었다. 케일렙은 네이던이 애용하는 쿄우코의 몸같이 매끈한 피부를 착용한 에이바를 떠올리며 자기 동일성에 대한 2차 점검 행위로서 자위행위가 더 효율적이고 차라리 더 내면적이라는 것을 확신하고 혁대를 풀어 지퍼와 바지와 빤스를 내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