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 Machina - 굴뚝 청소부



  당 영화의 백미 하면 단연 케일렙이 자기 의심에 빠진 이 대목이다. 에이바에게 너무 빠진 나머지 그 인공지능 로봇과 연애하는 상상까지 했었고, 단지 영어 못하는 시녀인 줄로만 알았던 쿄우코마저 로봇으로 드러나는 바람에 자신 역시 네이던이 개발 중인 시제품이 아닐까 의심한다. 주인공 케일렙은 튜링 테스트를 당하는 기분에서 도저히 헤어나올 길이 없어 우선 눈을 까뒤집고 구강 점검에 이어서 면도날로 전완 피부를 그어 피하 조직이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지 검사하려 했다. 데카르트식 악마의 21세기식 재림이다.

[1]
  시대정신의 아들답게 케일렙은 어딘지 이상하면 우선 몸으로 확인한다. 갈라진 살갗 사이로 빠알간 피가 줄줄 나오는 걸로 보아 적어도 뇌가 혈액 순환계를 의지한다고 판단한다. 피를 천연 생명의 직유라고 즉감해야 하는 지경이고, 그리라도 안 했다간 돌아 버릴 것만 같다. 이 즉각적인 판단이 유구한 성혈 신앙의 곁뿌리인들 어떠랴. 적어도 모기들이 그냥 지나갈 몸은 아닌 것이다. 일단 그는 스스로 인간임을 확신하고 본다. 자신이 여전히 고깃덩어리구나 싶고 그러므로 사람이구나 싶다.


  길고 지난한 발육 과정을 거친 육신인 게 을매나 다행스러운 일인지 애초에 자아의 정통성을 그리 확보해 보려는 시도 자체부터가 가히 인간답지 아니한가. 그렇게 케일렙은 자신을 제삼자화해 본다. 마음 같아선 눈도 파 보고 배를 갈라 미끌미끌하고 물컹한 내장도 만져 보고 싶었으나 불행히도 복부에 지퍼가 달려 있진 않다. 출혈 과다는 피하고 볼 일이다. 아니, 그런 치명상을 염려하고 목숨만은 걸지 않으려 팔뚝을 조심조심 살짝 긋는 소심함부터가 벌써 인간적이지 아니하냐. 이게 어디 감히 로봇 같은 게 느낄 공포심이냐. 이 대견스러운 자기 성찰에 모종의 안도감을 느끼고 나니 마음이 한결 낫다. 그리고 그는 가만히 거울을 들여다본다. 앞에 째려보는 눈이 있다. 지랄도 가지가지라고 말하는 표정이다. 그래 내가 잠시 미쳤긴 했지, 라고 케일렙은 자가 진단한다. 확인은 끝났다. 이제 서서히 새 사람으로 거듭나는 기분이다. 그렇다고 소심을 넘어 타의적 핸들링을 초극할 사적 선택의 자유가 지금 막 새삼 탱천하는 듯 비대해지는 것은 아니었다.

[2]
  그는 다시금 의심에 빠진다. 가벼운 자해 수순을 밟는 그 소심한 정도의 행동 형식으로 부족하나마 째진 살과 붉은 액체의 의미론을 마음에 논하지만, 소심한 형식은 소심한 내용을 결정짓는 법이다. 인간이거나 아니거나 따져 봐야 양자택일이고, 소심한 자해의 규모가 그가 이미 정한 소심한 뜻의 규모였으니 택일의 결국은 '인간'이다. 그에겐 이 선택이 소심해서 자기가 인간이라고 정한 근거였다. 인간이고 싶은 마음이 낳은 편향적 선택이라 하는 것 자체가 인간의 증명 아닌가. 그러나 애당초, 그가 사는 세상이 생물계와 디지털계의 간극과 단절이 융합의 기로를 이미 맞이했는지 어떤지 방금까지도 그의 무의식조차 안 건드리던 오싹한 질문이었다. 자신이 네이던의 음흉한 손에 소심한 캐릭터로 설정된 인공지능이면 어쩔 건가. 혼자서 뭔가 사부작사부작 만들고 있던 그자의 조용한 혁신이 거기까진 안 갔으리라는 단정은 단정의 형체조차 없던 전제였건만 혹시나 하는 마음이 이젠 의식 표면에서 부유하더니 앞서 내린 판단을 시커멓게 뒤덮기 시작한다. 인간만이 할 수 있다던 숭고한 자기 반성적 의혹마저 설마 디지털계로 넘어갔을 리 없다는 불문을 암귀 같은 의혹이 집어삼킨 것이다.

  사고로 죽은 엄마 아빠는 실재했는가. 거울 속의 요 비실비실하고 창백한 놈이 과연 인간인가. 보이는 것은 보고 싶은 믿음의 프로그램이 회수하는 유사 자기 증명인가. 자신은 에이바에 대해 튜링 테스트 역을 하는 차세대 남장 에이바가 아닐까. 아~ 씨발, 모든 것이 온통 인공지능이 엮고 짜는 매트릭스 속의 직조물일 것 같기만 하다... 이리하여 케일렙은 자기 의혹이 가당한 그 사변적인 수준에서 자고로 양도할 수 없다던 그놈의 인간미를 확보하려다 실패한다.


  이제 이판사판이다. 그 과정이 개미지옥 같다 한들 어떠하며 그 막판이 눈알을 파 내고 배를 가르는 꼴인들 어떠하랴. 할 수 있는 건 단계적으로 다 해 보는 게 인간답지 않은가. 죽어도 인간답고 비장하게 인간의 형식으로 죽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하여 그는 자기 의혹에 상당하는 부분적인 신체 점검으로 인간성이 가능할 것 같으면 우선은 배를 안 째고도 인간임을 확인하는 길을 생각하기 시작했고, 솔직히 그것은 면도기에서 면도날을 뜯어내던 중에 이미 문득 떠오른 방법이었다. 케일렙은 네이던이 애용하는 쿄우코의 몸같이 매끈한 피부를 착용한 에이바를 떠올리며 자기 동일성에 대한 2차 점검 행위로서 자위행위가 더 효율적이고 차라리 더 내면적이라는 것을 확신하고 혁대를 풀어 지퍼와 바지와 빤스를 내리기 시작했다.


BR 2049 = (Human + Replicant) + A.I.

[1] K&J
  얼굴이 노상 피범벅이 돼서 상처투성이로 돌아다니는 자가 다름 아닌 "껍데기" 레플리컨트라는 점은 82년 작의 정통성을 잇는 답습이다. 거기에 더한 AI의 등장과 역할은 21세기의 감성적 저변에 호응하는 정도의 타성에 머문 것 같지는 않다. 0과 1의 조합으로 현출하는 "조이"이야말로 당 영화에서 한술 더 떠 가장 인간적인 것의 정통성을 체현하는 인성에 속한 듯 보였기 때문이다. 그것도, 카스트와 흡사한 탄생 서열 및 존재 등급을 감안하면 영혼이 없다고 멸시받는 유사 인간인 동시에 온통 상업 광고로 뒤덮인 디스토피아의 슬럼가에서 경제 활동을 하며 사는 레플리컨트 '상품' KD6-3.7이라는 소비자에 의해서 인조인간 이상으로 무한 대량 생산의 극치에 있는 추출된 인간미가 육체적 실체를 못 가진 시청각적 AI 상품으로 소비된다고 하니...



KD6-3.7 THE SKIN-JOB

  레플리컨트 러브가 레플리컨트 판매 영업을 하는 장면처럼 케이도 소비 생활을 하되 특화된 인공지능처럼 소비되는 특화 제품 중 하나에 불과하다. 탄생 용도는 가히 리빙 데드 못지않았으나, 이런 영혼 없는 소비 노동자를 대량 생산하는 세상과 월래스 사는 케이의 삶과 표정에서 희노애락을 거의 다 지우고도 전동기와 톱니바퀴와 유압 실린더 등으로 작동하는 로봇이 아닌, 웬일인지 술과 음식 종류를 자유로이 고를 수 있는 만큼의 사적인 자유의지와 인공지능 소비 정도는 허락한 모양이다. 게다가 일당백의 뛰어난 체력과 지능에 대하여 상명하복 기질을 얄궂은 음성 복창 시스템으로 관리해서 공공의 삽질 노동력으로 전환하고 헌신하도록 한 것이 마치 어지러운 지상에 경제 질서와 약간의 평정이나마 가져온 월래스의 공헌이었을 것만 같은 사회 분위기다.

  성년으로 태어나 유년의 기억을 가지면 자신에 관한 모든 것이 가짜 같다. 그런 인공 과거를 정신 구성의 일부로 가진 케이의 비운에 견주어 조이의 디지털 운명은 어떠할까. 공감하는 미소와 위로하는 눈물 등 성선설적 특징을 가진 인격성 프로그램은 구입되어 가동된 시점서부터 케이와의 사생활이라는 맞춤학습형 특이점을 기억으로 구축하며 봉사하도록 되어 있다. 무론 그런 소비 산업적 목적이란, 동류만을 색출하여 처단하게 되어 있는 규격화된 인성의 임무인지 매춘 노동자 메리에트처럼 비인간의 규격화된 직업인지 모를 일개의 레플리컨트 입장에서 알 바는 아니다. 어차피 가짜 인생이다. 그래서 아담과 이브 이래의 사람 형상과 커플링 정서에 빚지게 되면 고독 또한 덤으로 따라오고 케이에겐 조이가 더없이 소중한 안식처로 묘사된다. 이처럼 여성성 홀로그램에 심히 감정 이입하는 유사 인간을 오브젝토필리아 환자 같다며 비웃기는 어렵다. 당 영화의 시점은 사실, 한낱 인공지능에 지나지 않는 것이 유사 인간의 사적 인생에 껍데기조차 못 되는 덤과 같은 역할로 끝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인공적인 유사 인간미가 인간들이 정작 잃고 말았다 할 것을 어떤 식으로 대체하고 있는가에 관한 메타포로도 그리 낯설지는 않다.



홀로그램도 사랑을 꿈꾸는가

  이를테면 로봇 같고 잔혹하기만 할 것 같은 러브가 월래스에 대한 의사 대행적 입장과 자신의 억압된 인격 사이에서 흘리는 두 차례의 눈물과 같이, 수많은 작품에서 상상 가능한 온갖 유무형의 비인간에 수없이 응용되어 왔던 이 '인간 같은 것'에다 심은 연애 감정이 어떻게 자라고 어떻게 비극이 되는지 관객더러 잘 음미해 보라며 요구하는 당 영화의 각별한 만듦새와 호소력은 괄목하고도 남을 만하다. 또 이를테면, 케이는 홀로그램을 단말기로 휴대하고 아파트를 영영 떠날 경우 자신의 실수로 조이를 행여나 잃지 않을까 하는 사태를 걱정하고, 조이는 자신 때문에 그를 쫓는 이들에게 오히려 뒤를 밟히지나 않을까 케이의 안위를 걱정하고는 자신의 백업판을 포기한다.

[2] 각성
  정서의 묘라 함은 유사 인간과 그 유사 등급에도 못 미치는 광학적인 존재의 연애담에 사로잡히는 순간에 생기는 감정이입이다. 러브의 구둣발에 짓밟히기 직전의 "I LOVE YOU!"는 조이가 단말마로 표출한 감정이었다. 물론, 조이의 절규는 소멸 직전에 주인을 위하는 척 또 한 번의 구매를 재촉하는 해당 프로그램의 숨은 마지막 스케줄이자 여운을 남기려는 자본의 상술일 수도 있겠다. 거대한 광고용 조이를 마주했을 때 케이의 기분이 어땠겠는가. 새 프로그램과 휴대용 단말기 구매를 고려하며 상심을 달래려 하거나, 아니면 조이가 어차피 시장에 널리 유포된 제품 수만큼이나 허상의 연인에 불과했고 그간의 자신의 애정도 허상에 불과했었다며 그 시퍼런 얼굴처럼 절망은 차갑기만 했을 수도 있겠다.



각성은 과연 차가운 환멸이었나

  그럴 만도 한 것이, 스토리는 애초부터 케이의 정신을 조금씩 피폐한 지경으로 몰아갈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인데, 홀로그램의 등장에는 조이가 일개의 상품에 불과한, 그것도 케이 자신을 제작한 월래스 사의 제품임을 잊지 않도록 하는 장면과 조롱 섞인 대사가 집요하게 따라붙기 때문이다. 이로써 일부 관객의 머릿속엔 3D 연인에 흥분하는 사회 부적응 독신남의 인간 실격 같은 이미지도 눌어붙게 마련이다. 그래서 레이저 쇼를 막 끝낸 광고 홀로그램이 홱 돌아서는 무관심 못지않게 파리하게 조명된 케이의 안색을 얼마든지 조이와의 애정 행각에 대한 부정으로 여기고, 요컨대 Her(2013)에서처럼 테오도르가 만질 수 있는 에이미로 돌아갈 반성적 계기같이 '깨는' 대목으로 간주해도 무방하다.

  하지만 여기서는 저 광고 앞에서 케이가 기억 속의 그 조이마저 허상으로 간주하였으리라고 보진 않는다. 82년 작의 '인간보다 더 인간다운 레플리컨트'라는 종래의 기치 위에다 작금의 시대 분위기답게 당 영화가 사랑을 꿈꾸는 AI를 얹었다가 막판 반전인 양 도로 내려놓기란 어렵다. 조이가 인간과 레플리컨트와 인공지능이라는 존재 서열을 넘어서는 '인성'을 가진 듯 묘사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월래스 사 휘하의 독점 시장이 제공한 허구에 조이에 관한 사적인 기억을 예속시키고 이로 유사 현실의 기억을 극복하는 상심으로 규정한다고 보는 입장은 유사든 가짜든 허울이든 인간다움의 가치에 열려 있는 블레이드 러너식 분위기와 충돌한다.

  물론 디스토피아도 아닌 Her의 세계관에 눈감고 인간 테오도르의 배신감 및 거듭남에만 호응해서 케이의 각성을 목도하고 싶은 것이라면 이는 어딘가 그 각성을 인간의 앞잡이가 응당 해방군으로 전향하게 되는 '빨간 약'으로 보는 관점과 연동되어 있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케이가 더 원이나 존 코너의 운명을 짊어진 자는 아닐지언정 정치적으론 일견 정당해 보이는 해석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말이다. 이 해석은, 플라토닉한 동굴도 사이퍼가 그토록 되돌아가고 싶어하던 매트릭스도 기실 부분적으론 안주할 만한 것이었다는 심정을 거부한다고 보는 그놈의 각성이 하필이면 데커드 암살 실행으로 구체화되리라는 불행도 떠안고 가야 된다. 영화는 왜 케이가 레지스탕스 리더의 지령을 굳이 거부하고 데커드 구출에 나서도록 할까. 몸도 마음도 너덜너덜하게 만든 참에 오로지 이산가족 상봉에 그 한 몸 바치게 하기 위해서였나.

  그러기 위해서만은 아닌 듯하다. 전편과 속편이 데커드와 레이첼, 케이와 조이라는 두 커플에 관한 일종의 러브 스토리이고, 이번 속편이 케이와 조이의 관계를 데커드와 레이첼의 상징적 재활이라 보면, 35년이 지나서야 겨우 나온 걸작의 속편이 케이에 의한 데커드의 죽음을, 즉 홀로 남은 두 남자가 서로 죽고 죽이는 사투를 감히 클라이맥스로 삼을 리는 만무하다. 그런 상상은 아예 각본 집필 단계서부터 원천 봉쇄되어 있었다고 봐야 맞다. 그리고 론 울프인 만큼 평소 과묵했던 케이가 월래스 사의 광고용 조이를 어찌 바라보았는가는 월래스 손에 부활한 또 하나의 레이첼를 마주한 데커드의 반응이 대구를 이루어 대신 표현하고 있으며, 이 두 장면은 마치 죽었어도 죽지 않은 존재를 어떻게 품고 있었고 어떻게 품어 가는지에 관한 몽타주와 같다. 두 남자의 인성적 방향이 다르지 않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데커드 구출 노선에는 전작과 후작이 디스토피아 속에서 꽃피운 로맨스가 걸려 있다.

[3] 전뇌적 자율과 해석적 포화(飽和)
  섹스로이드의 육체에 인공지능의 환영이 맞는 듯 어긋나는 듯 아슬아슬하게 결합하는 그 섬세하고 아름답고 기기묘묘하기 짝이 없는 장면은 조이 스스로가 케이 모르게 알아서 메리에트를 불러들였다는 점을 감안하게 되면 배려심으로 포장된 이 인공지능의 '자유로움'이라는 것을 생각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차라리 메리에트가 형사 집까지 미행하면서 따라와 들이닥친 게 아니냐고 착각하는 편이 태생적 루저들을 위한 한낱 3D 위로용에 지나지 않는 프로그램에게 그런 능력 같은 건 있을 리 없다고 일축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그러나 순간 당황하는 듯하다가도 조이의 돌출 행위를 이내 받아들이는 케이의 모습에서 그것을 오작동으로 치부하지 않는 만치 그 범위를 종잡을 수 없는 모종의 자유가 확보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게다가 그가 귀가하기 전부터 조이가 여러 수준의 사고 모드에서 그것을 미리 계획하고 준비하고 실행한 것이 분명한데, 이를 고려하기에 이르면 스스로 알아서 주인을 당혹스럽게 할 만큼의 무언가를 사전에 하거나 저지를 수 있다 함이란 도대체 무얼 뜻하게 되는가.


Luv : "I do hope that you're satisfied with our product"
경험하는 육체를 꿈꾸는 '고스트'

  메리에트와의 환영적 결합은 케이가 만든 질박한 음식 위에 놓인 홀로그램 요리로 앞서 예고된 바 있다. 그리고 해방군의 일원 메리에트는 홀로그램을 휴대하고 다니는 케이를 첫 대면에서 대뜸 조롱했던 여자다. 그랬던 여자가 어쩐 일인지 홀로그램의 시각적 오버랩을 자기 육신에 용인한다. 아무리 덮어씌워 봐야 신체 접촉과 온기와 쾌감은 나의 것이라고 실질적인 우위를 주장하는 생각에서나, 직업적인 수동성도 레지스탕스 임무 수행의 일환이라는 생각에서 비롯된 태도일 수 있다. 한데 이에 조금 앞서 조이가 주도권을 잡는 묘한 대목이 나온다. 콜걸의 형상에 자신의 외모를 입히려는 동안 비웃기에 바쁜 여자 레플리컨트보고 조이가 그 입 다물라 한 것이다. 그리고 메리에트는 입을 다물고 싱크로에 잘 맞도록 몸짓도 고분고분 느려지며 부드러워진다. 그러고 보니 이 상황과 야릇한 분위기 자체를 애초에 조이가 연출했고 지금 주도하고 있다. 거기에 메리에트도 따르고 케이도 따른다. 그래 놓고 섹스에 돌입하기 직전에 영화는 조이가 원래 무엇이었냐며 잊지 말라는 듯 장면을 전환해서 대형 네온 빛 광고를 보여 준다. 그러나 또, 이튿날 아침이면 케이가 안 보이는 가운데 메리에트 앞에 스스로 기동해서 나타나선 볼일은 끝났으니 이제 나가달라는 조이의 질투심 어린 듯 보이는 차가움은 왜 보여 줄까. 마그리트의 '이미지의 배반' 효과라도 노린 겐가.

  월래스 사가 만든 레플리컨트가 행위 규정을 벗어나면 같은 회사의 홀로그램이 감시 활동을 일삼을 법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러지 않는 것으로 보아 이 인공지능 제품은 정말로 자율성을 가진 프로그램이었던 모양이다. 해킹으로 조종당하는 장면은 일절 나오지 않고, 있어 봐야 러브한테 위치 추적을 당하는 게 고작이다. 아니 자율성은 상상 이상이다. 데커드를 찾아 나설 때 조이는 위치 추적당할까 봐 걱정하며 케이에게 (아마도 전화 장치가 포함된)콘솔을 파괴하고 가자는 충고를 하는데, 이 판단 수준은, 옥상에서 비 맞으며 동공의 초점을 서로 맞추는 애틋한 순간에 조쉬로부터 걸려 온 전화로 일시 정지당하던 딱한 처지에 비하면, 이제 그냥 자율적이라 할 정도를 가볍게 넘어서고 있다. 희생을 의미하는 그런 자체 판단이 불가능할 것이라는 케이의 의아한 표정 같은 건 전혀 안 나온다. 그 자율적 판단 능력을 전제와 같이 심부에 깔고 둘은 상위의 의미론적 무대로 올라가서 판단 내용을 문제 삼아 서로가 서로를 걱정할 뿐이다. 또 그 판단 수준은 창조주 월래스와의 단절을 명시한 것 같기도 하다. 그러고 보면 이 세계는 엘든 타이렐의 창조 의도가 로이 베티의 주거 침입과 살인 행위라는 잉여적 자율성을 그 부메랑 효과로서조차 예상치 못하고 종말을 맞이했던 그런 세계였다. 따라서 '인간'에서 추출된 인간다움의 이데아가 주입된 유사 인간을 그려 높이 평가받아 왔던 82년 작의 맥이 홀로그램에 레이첼의 탈선같이 과잉 자율성으로서 깃들지 않을 이유가 어디 있을까.

[4] 각성의 재구성
  기억이 몇 푼짜리 소프트웨어처럼 유통되는 세상에서 주입식 기억을 가진 자가 정체성 진위를 두고 항상 갈대와 같이 흔들리는 것은 '인간적으로' 늘 옳다. 그건 줄곧 흔들고 흔들리기 위한 약점이 되어 왔다. 케이는 유년 시절의 한 기억을 허구로 자각하는 것으로 인간과 자신을 구분 짓고 여성적 허상과 동고동락하며 살아가던 참이다. 그랬는데 여차여차해서 목각 말을 발견하기에 이르고 자신이 레이첼의 산도에서 나왔다는 믿음을 굳히는 순간 그는 심히 흔들린다. 그리고 서서히, 비록 인간의 개였고 끄나풀같이 살았으나 낮게나마 자기 완결적이었던 자의식에 환영과도 같은 '인간'이라는 마가 끼기 시작한다. 이 주문에 걸리면서 존재 가치는 한없이 상승하고 조이도 옆에서 그 상승 가치를 거들어 그에게 고유명사를 선사한다. 스텔린 박사를 만나 자신의 기억이 진짜라고 확답받을 즈음 이미 그의 심경에는 데커드 앞에 어린 시절의 사진을 당당하게 내보인 레이첼의 자존감과 신앙심이 어렸다.

  물론 케이 자신, 데커드의 정체성 여부에 따라 반쪽짜리 인간일 수도 있고 계속 차별받을 레플리컨트 후예로 남을 수도 있다는 사실 같은 건 아무래도 좋았다. 그의 손에 죽기 전 새퍼가 언급한 "기적"은 그가 일련번호로 생산 출시된 모조 인간이 아니었다고 믿어 의심치 않을 생명 탄생의 프로세스와 서열에 관한 것이었고 거지에서 왕자로의 전환을 형용할 기적이라 할 만한 것이었다. 케이는 요람에 관한 인간 일반의 형식을 갖추는 것만으로도 인간이 다 된 기분이다. 이를 기뻐하고 감격하는 표현과 눈물은 조이가 기꺼이 대신했다. 그리고 그는 인간인지 껍데기인지 모를 아버지를 찾아 나선다.

  그러나 아기 탄생과 산모의 임종을 목도한 레플리컨트가 전한 진실은 정수리를 쪼개는 듯한 낙망이었다. 그는 원점으로 되돌아오고 만다. 아니 원점 이하였다. 데커드 암살이 저항 세력의 생존을 위한 것이라는 그 저항군 리더의 간청도 잠시나마 어느 노인을 아버지라 믿었던 심정에는 비수를 꽂는다. 인간으로부터도 동류로부터도 조롱받던 조이마저 이미 잃은 상태다. 위로는 어디에도 없었다. 질척이는 발걸음은 무겁고, 내리는 빗물은 아파트 옥상에서 누린 밤비의 낭만을 식히려는 듯 그저 차갑기만 하다. 눈물 같은 빗물에 젖고, 핏물에 얼룩진 상처투성이 얼굴로 케이는 이제 핑크빛 대형 홀로그램 앞에 서게 된다.




  육신을 희구했던 조이의 노력과, 자궁의 아들이었기를 바란 그의 기대가 동질적 허상이었던 것처럼 마음은 다시 모조 인간이 된 공허만큼이나 텅 비었고, 저 거대한 핑크빛 조이도 그 어떠한 개별적 메모리조차 없는 텅 빈 상품이다. 제인 도 같은 상품명 '조이'가 존 도 같은 고객 '조'를 부를 때, 한때 홀로그램에게서 소중한 축하 선물같이 받았고 아버지로 보이던 자에게 인간의 표징인 양 자칭하여 전했던 고유명사도 이젠 익명 같은 무명이 되어 버렸다. 애정으로 교통했으나 서로 만질 수조차 없었던 기억 속의 안타까움도 그 핑크빛 무명의 바다 속으로 가라앉는다. 내 것이라 할 수 있는 건 어느 것 하나 남지 않았다. 그렇게 그는 LAPD가 머지않아 퇴역시킬 쫓기는 껍데기 신세와 하락한 목숨 값을 받아들이고 환멸에 빠져 조에서 다시 케이로 돌아가고, 거기서 한층 더 초라하게 KD6-3.7으로 퇴행하던 참이었다.

  문득 그는 새퍼와 메리에트와 스텔린과 데커드 들을 주마등같이 떠올린다. 농부 새퍼는 성녀를 기억하는 묘지기로서 형사의 총에 죽어 갔다. 빈정거리다가도 자기 형상에 조이의 환영을 조용조용 가만히 허락했었던 메리에트는 얼마 전 케이의 뺨을 어루만져 주었다. 월래스 사로부터 기억 제조 부문을 수주하던 스텔린 박사는 왠지 그의 과거를 자기 일처럼 눈물까지 흘리며 그의 거짓 기억이 진짜였다고 했다. 레이첼을 저세상으로 떠나보낸 데커드는 대정전 사태 후 숨겨 둔 딸의 자취마저 잃은 이래로 사막 한가운데 있는 카지노에서 프레슬리나 시나트라, 몬로 같은 소통 불가능한 낡은 홀로그램들의 쇼와 술과 개 한 마리와 낡은 기억으로 기나긴 고독을 달래며 홀로 숨어 살고 있었다. 노인이 왜 네댓의 주먹을 날리며 적과 동지의 구별과 '인간다움'에 대한 확인에 확인을 거듭해야 했는지, 저항할 의사를 보이지 않았는데도 그렇게 얻어맞고 있을 수밖에 없었는지 케이는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의 기대 찬 행보 탓에 어떻게 조이가 소멸되고 데커드가 위기에 처하게 되었는지도 잘 알고 있었다.




  릭 데커드의 고백이 떠오른다. 그리고 이어서 그의 무의식이 아무런 논리적 연결점 없이 확신과 당위의 그림자같이 불현듯 떠올린 애나 스텔린의 모습은 진실을 알게 된 후로 견디기 힘들었던 이식된 기억과 고유한 기억의 분리를 다른 차원으로 몰아넣기 시작한다. 케이는 그녀가 아픈 옛 기억이 처음 만난 레플리컨트의 기억 속에도 편재한다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되어 자기 어린 시절의 비극에 눈물짓고 케이의 비극에 흐느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는 레이첼이 남기고 간 아직 살아 있을 마지막 사랑과 희망의 소재지를 모른 채 월래스의 손아귀에서 고문과 절명의 시간을 기다리고 있을 부성애를 생각해 낸다. 또한 자신이 이 부녀 간 해후의 유일한 연줄이라는 것도 의식하기 시작했다. 아직 확인되지 않은 사실과 간곡히 바라는 믿음은 그의 양심과 존재 가치를 걸 이 새로운 각성 안에서 이때쯤 벌써 혼융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월래스가 준비한 레이첼의 홍채 색을 보고서 영원히 상실한 레이첼의 푸른 눈을 상기하며 눈앞의 가짜를 거부하는 데커드의 단호함이 그 어떤 정체성도 못 가진 까만 눈의 네온 빛 조이를 바라보면서 기억 속의 눈망울을 떠올리는 케이의 결심이다. 레이첼이 죽었듯이 조이도 '죽었다'. 하지만 레이첼이 데커드에게 유일무이했듯이 마음의 눈은 벌거벗은 홀로그램 앞에서 주입되지 않은 기억 속의, 사랑을 꿈꾸던 홀로그램을 본다. 그리고 이제, 저항군 쪽의 지시를 우회하고 월래스의 앞잡이에 대항하는 길로써 복수가 데커드의 구출을 겸한다는 가능성에 목숨을 걸고자 레플리컨트 '조'는 빗물 젖은 권총을 점검한 후 눈물 같은 밤비 속으로 푸조를 띄운다.







리어카맨


  수레 주인의 행색은 가히 수레 주인답다. 그러나 이것은 간혹 온종일 도심을 돌아다니다가 하루에도 족히 50명쯤은 목도할 수 있는, 생활고에 시달리는 파지 줍는 영감의 모습이 아니다. 리어카에 각종 과일이 실려 있는 것도 아니다. 이래 봬도 현해탄 저편에선 대단히 저명한 모험가로 통한다.

  나가세 타다시(永瀬 忠志). 이 사람은 삶 자체가 노상 인생이라 할 만치 무시무시한 도보 여행 경력(링크)을 보유하고 있다. 한데 그가 세계 일주하는 데 짐 운반용으로 사용한 것은 차량이나 오토바이가 아니며 자전거도 아니었다.

  아~ 우째서 하고많은 수단 중에 요런 걸 택하셨나. 어찌하여 곤궁의 상징, 그 어떠한 세련미도 없는 이런 빈한한 생계용을 도보 여행, 세계 일주의 도구로 삼았으며 그렇게 애달프게 끌고 다녀야만 했을까. 어떻게 저럴 수가 있단 말이냐. 이 사각형 이륜 수단에 비하면, 배낭 하나 달랑 걸머메고 이국 도심의 아스팔트며 작열하는 사막이며 한적한 비포장 길, 독충이 우글거리는 정글 같은 데를 싸다니는 용기와 고독조차 그저 낭만적일 뿐이며 댄디할 만큼 귀족적일 지경이다.


  당연히 모든 감동의 값은 그 새까맣게 탄 동양인 중년의 모습과 더불어 그가 질질 끄는 "리야까"에서 나온다. 저 모습은 우리나라나 몇몇 아시아에선 얼마든지 통하고도 남을 일상스러운 꼬라지다. 물론 한발 양보해서, 이 황인종 아제가 아프리카고 유럽 대륙이고 뉴욕 한가운데에 갑자기 나타나 저런 동양식 리어카 모델을 끌고 다니는 것까지야 가던 길을 멈추고 눈으로 추레한 사내와 리어카의 동선을 딱히 좇을 것도 없는 모습일 수도 있다. 그러나 저게 세계 일주를 하는 여행가의 모습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그 누구라도 아무리 바쁘든 직립보행을 한 번쯤 멈추고서 보는 일말의 예의 정도는 갖추어야 된다.

 하지만 이 사내와 리어카가 희한하고 심히 경이롭기는 하되, 솔직히 이런 식의 여행을 나 자신이 하고 싶진 않다. 성격의 9할이 인생에 대한 온갖 짜증과 염증으로 구성된 병신 주제에 시간이 있으면 방구석에서 처자빠져 자지 뭣하러 리어카 끌고 저런 황야를 누비려 들겠는가. 육체란 더위와 추위와 갑갑함과 불결함과 위험과 피로를 항시 스스로 진단하며 정신에 필요 이상으로 경종을 울리는 법이고, 육적 계급 서열에서 제 팔다리를 사지(四肢)로 하대해 봤자 뿌리에 해당하는 신경계는 늘 가지의 감각에 바람 잘 날 없는 법이다. 발목 한 번 삐긋하면 만유인력과 생활이 을매나 불편해지더냐. 오른손잡이가 오른손 검지라도 다쳐 봐라. 방광 터질 때 남대문을 열고 물건 꺼내는 데도 지장 있다. 하물며 골신에 분포된 각종 통각이 작당해서 정신에 달려들어 모험심의 줏대를 뒤흔들고 어지럽힐 저런 외국 오지의 뙤약볕 아래서 무슨 놈의 삶의 의미를 건져 보겠노라고 거지같이 저러고 다니겠는가. 결국은 객사가 말로일 게 뻔하다. 나 같으면 육갑은 안전한 방 안에서만 떨겠다.

  그런데 말이다. 그게 안 그렇다. 가령 저 양반이 자기와 함깨 한 일 년 정도 리어카를 끌어 보지 않겠느냐고 행여 꼬셔 오기라도 한다면, 소생은 최대한 엄숙하게 천천히 입을 열어 최소한 일주일만 시간을 달라 할 것 같다. 그러고선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겠지만, 끝내는 돈 들고 리어카 가게를 기웃거리지 않고는 못 배길 것 같다. 왜냐 하면 노숙자 꼴과 여행가 혹은 모헙가라고 하는 이미지들의 조합 중에 노숙자 쪽이 소생의 면상과 옷차림새에 더할 나위 없이 어울리는 이미지이기 때문이다. 거기다가 재수가 좋으면 어느 거지 같은 놈한테 여행가 혹은 모험가라는 찬란한 명색까지 덤으로 따라붙는 수도 있다.



呪怨 더 파이널 - 빤스 종결

  뭔가를 그러저러한 식으로 선보였다는 의미에서 시리즈 첫 편은 너그럽게 넘어가 주자. 그리고 당 시리즈의 전매특허 같은 심히 가소로운 목구멍 소리도 언급하지 않겠다(귀찮다).

  늘 깨는 내용이었다. 이번 파이널 편도 예외는 아니다. 뇌과학자 사와구치 토시유키는 방송에서 자기 전에 웬만하면 공포 영화는 보지 말라 했다. 명함을 걸어 가로되, 꿈에 나오기 십상이란다. 직업적 권위가 자신의 발언을 시청자들의 악몽으로 증명해 주리라는 주장이지만, 취침 전에 숱은 공포물을 보긴 했어도 그런 피해를 본 적은 지금껏 거의 없다(있다 해도 빈도상 우연이다). 이래 봬도 장르를 끔찍이 존중하여 대체로 자정 무렵을 골랐었고 불도 다 꺼 놓고 보는 편인데도 말이다.

  어쨌거나 전편을 다 봐 놓고 이제 와서 하나 마나 한 소리지만 귀신한테도 패션이라는 게 있는 법이다. 아무리 경건하고 겸허한 자세로 영화에 임하더라도 허옇게 분칠한 꼬마 강시가 꼴에 귀신이라며 속옷 바람으로 등장하게 되면 공포 농도는 제로에 가까워지다 못해 매번 실소가 나온다. 관객이 누려야 할 공포 정서에 빤스가 그 어떠한 파급력도 없을 것이라 판단했을 영화 제작진과 투자자들이 안쓰러워질 지경이다.


"링" 이후의 최대의 공포
당 영화가 도입한 옐로우 빤스 공포

  자기 색깔이 계급적 스펙과 PR로 짬뽕 퓨전같이 된 세상에 왜국의 부모들이 미성년 자녀들에게 여전히 흰색 속옷을 사서 입히는 경향이 남았다 할지라도 우리는 사에키 토시오라는 아이가 착용한 브리프가 우째서 햐얀색인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어찌하여 잔뇨와 덜 닦인 변의 누증된 잔재로 물들곤 하는 그 호러스러운 색깔이어야만 했냐 이 말이다. 이런 고색창연한 무채색 빤스를 일주일에 한 번, 아니 보름에 한 번씩 목욕탕 갈 때나 갈아입으며 살았거나 그렇게 자랐던 세대라면 그 흰 바탕이 반사적으로 찾게 만드는 색깔이 너무나도 뻔하니까 하는 말이다. 이 흰색이 드러낼 유일무이하고 만고불변할 공포의 유채색이란 누르끼리한 황금색밖에 없기 때문이다.

  가만히 기억을 더듬어 보자니, 이 프랜차이즈 외에 여타 왜제 심령 공포물치고 햐얀 빤스 입은 귀신이 주된 캐릭터로 나온 영화가 과연 있었던가. 없으리란 보장은 없지만 적어도 기억에는 없다. 고로 "주온"은 대단히 특이한 게이스라 할 수 있다. 그래도 처녀 귀신이건 할매 귀신이건 토시오의 엄마 사에키 카야코건 간에 새까만 치모가 살짝 비치는 하얀 란제리 차림으로 등장시켜서는 안 된다는 분별력 정도는 물론 당 시리즈도 갖고 있다. 현역 여성 아이돌을 관행적으로 출연시켜 온 미성년자 관람가 공포물이면 치모 출몰은 더더욱 불가하다. 여기서 토시오의 빤스는 설사 초등학교 입학도 안 한 아이 같다 하더라도 "감각의 제국"에 등장하는 애들처럼 완전한 누드일 수만은 없는 만큼의 중용적 패션이다. 오우시마 나기사 이후의 감독 세대가 이 의상 꼬라지를 격세지감의 공공연한 합의점으로 여겼을 분위기가 시리즈 전편에 빤스의 등장을 일단 용인해 본 게다. 요컨대 쇼우와 중기의 감독이 연출한 호러물이었으면 토시오는 여주인공의 면상에 대고 고추를 달랑거리며 알짱댔을 가능성이 있다.

  80년대 말까지만 해도 어린 자녀의 아래옷을 내리고 길거리에서 대소변을 보게 하는 부모, 조부모의 모습이 흔했었던 게 우리나라다. 생각건대 왜국 또한 한때 어린이의 나체는 동네 곳곳의 생활 풍경이었을 게다. 단지 64년 동경 올림픽을 기점으로 대도시 공공 장소에서부터 신체의 특정 부위 노출과 배설물 유기의 제한이 계몽적으로 의식화되어 왔을 뿐일 테고, 그러한 국제 스포츠 대회는 88 올림픽같이 으레 국제적 이목이라는 거울 역할을 하는 법이다. 빠리 시내의 구린내 지린내가 일급 향수 제조를 가능하게 했다는 게 언제였다는 듯이 오늘날 일등 문명 국가 행사를 하는 프랑스처럼, 온천 지대가 많았다는 것을 빌미로 태생부터 매일 목욕을 즐겼었다고 국민교육헌장급의 문화론으로 우기는 왜국 국민도 사오십 년 전엔 겨우 한 달에 한 번 묵은 때를 벗기던 사람이 다수였다(대도시를 제외하면). 그랬다 해도 거꾸로 말해 경제 고도성장을 전후로 한 그 시절엔 영화에 아예 잠지를 드러냈으면 냈지, 반복적인 빤스 차림으론 어딘지 아이답지 않았을 인상이 영화 관객에겐 여전한 시대였지 않았나 싶은 의혹도 가당하다.

  그러나 메인 캐릭터로서의 귀신이 그렇게 전라로 나오면 공포는 즉각 안드로메다행이다. 애 자지 갖고 무슨 놈의 공포냔 말이다. 설령 60년대였던들 공포와 실물 성기의 조합은 공포 정서를 방해하지 아니하였을 도리가 없고, 게다가 무서운 대목에서 포경 성기가 나와서야 쓰나. 한데 아무리 그래도 아동 인권을 감안한 교양적인 당 시리즈에서조차 귀신한테 입힐 의상으로서의 전통 소복을 걸친 아동의 모습이 왠지 안 어울린다 싶었을 것이다. 게다가 유령이 되기 전에 걸치던 평상복이라고 입고 나와 봐야 토시오 자신이 귀신이라 주장할 길이 시각적으로 애매해질 것만 같다. 그리하여 빤스로 절충한 모양인데, 영화가 요렇게 자꾸 단벌 아동을 들이밀면 볼 때마다 문제는 빤스 하나로 일주일을 버티며 유년시절을 보낸 어느 아이큐 두 자리가 누우런 색을 반사적으로 찾지 않고는 못 배긴다는 데 있다. 공포에 제대로 정신 집중할 수 있게 제발 애 옷 좀 입혀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어린이의 반 누드가 지나치게 일관되기 때문에 관객이 "주온"을 떠오릴 때면 그 모습이 영화의 표징이기를 의도했다고밖에 볼 수 없는 판국이다. 위에서 말했다시피 그 꼴은 실로 실소감이다.

  귀신이 입고 나타나는 겉치장 의복으로서의 평범한 캐주얼룩, 그리고 심지어 귀신 전용 하얀 소복이라 해도 그것들은 공포물의 문맥에서 이미 가치 중립적이다. 평상복이면 살아생전에 즐겨 입던 옷 내지 죽었을 때 입은 옷이겠거니 하면 되고, 소복이면 귀신의 유니폼이겠거니 하면서 그 출현 자체에 정신 통일해서 전율해 주면 그만이다. 대개 의식할 것이 못 되고 또 대개 의식도 안 되는 소품이다. 그러나 빤스는 다르다. 기본적으로 빤스는 의복과 알몸의 아슬아슬한 경계로서 위치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19금 영화나 뽀르노가 아닌 다음에야 그 뭣만큼은 반드시 가리고야 말리라는 현대 패션의 최종성에 가깝다. 천 조각이나마 걸치고 딴 시선들을 차단하기보다는 빤스가 노출되었을 때 도리어 벗었다는 함의를 노출한다. 지적 설계자의 눈초리가 365일 24시 편재하는 가운데 에덴에서 다리 달린 뱀과 발가벗고 뛰놀던 남과 여 역시 농경 노동과 해산의 고통으로 내몰리기 전에 원시적인 속옷을 준비하는 작업부터 먼저 했었다. 태초서부터 가리개는 가려진 것의 가리킴이요, 더욱이 그것이 하얗다면 그 안에 숨은 실물이 용변 끝에 남기는 찌꺼기의 묵은 칼라에 관한 이차 지표이게 마련이다. 그러니, 그 빤스 차림을 볼 때마다 소생은 삶의 누우런 리얼리티가 부지불각 의식 속으로 치고 들어오는 느낌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덜 성숙한 만큼이나 토시오는 성징 면에서 중성화된 캐릭터 같고 또 나이를 먹지 않는 만큼이나 빤스도 새것처럼 늘 하얗다는 각본의 묵계가 귀신이라는 초자연적 속성 하나면 대번에 용인될 것이라 하는 전제가 신경 쓰인다는 말이다. 그 빤스라는 의상이 공포를 훼손하지 않을 것이라 여기는 제작진의 태도가 한심했고, "주온" 하면 소생은 토시오의 빤스로 기억했고 앞으로도 그럴 게 명백하다.

  "링"을 보면서 살짝 쫄았던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내리뜬 눈깔 흰자위로 소름을 정의하던 그 장면이 기억에 남았을 것이다. 나오미 왓츠가 출연한 할리우드판 재탕은 깔끔한 연출이 돋보였으나 사람 눈이 줄 수 있는 공포를 좀비 비스무리한 일그러진 얼굴에다 박아 넣음으로써 공포 함유량을 거의 말아먹은 감이 있었다. 그러나 귀신한테 세마포 같은 소복을 입히는 클리쉐이로 관객으로 하여금 최소한 그 안면에 집중하도록 되어 있기는 했다. 그리고 일제고 미제고 간에 귀신이 최소한 빤스 바람은 아니었다는 게 중요하다. 나체 유령이 등장하는 "샤이닝"은 이것이 초능력물이었다기보단 사이코 스릴러에 가까웠던 까닭에 세련된 성인 공포물이었다. 가령 소복을 홀라당 벗어 던진 사다코를 떠올려 보자. 귀신 가슴에 메이드인저팬 브래지어가 보일 것 같은가. 우물을 넘어 브라운관 밖으로 나오던 그 여자 귀신이 유방을 아래로 출렁이며 엉금엉금 기고 기다가 마침내 타카야마 류우지 앞에 당도하여 천천히, 아주 천천히 일어섰을 때, 이 교수의 시선이 귀신의 눈깔이 아니라 음모 윤곽이 거무튀튀하게 비치는 젖은 브리프에 멈추었더라면 누가 소름이 돋겠느냔 말이다. 내가 빤스에 전율하랴. 따라서 앞으로 그 어떠한 심령 공포물에서도 함부로 빤스를 내세워서는 아니 될 일이다. 그리고 아동 귀신은 자제해 달라 하고 싶다. 귀신이더라도 애는 애일 뿐이다. 이 세팅부터서가 애초에 공포를 반감하는 요인이었다.


  자 본론을 끝낸 김에 충고 하나 하자. 하고많은 근사한 나라들을 다 놔두고 하필이면 그대는 지금 2박 3일 동경 패키지여행 중일 수도 있다. 묵고 있는 호텔 방구석에서나 그곳 변소에서 행여 저런 행색을 한 아이라도 목도하게 되면 쯧쯧 뉘 집 아들내미인고 생각하기 전에 빤스 앞부분 색깔을 잘 봐라 하고 싶다. 색깔이 누렇다. 그러면 아이는 필시 인간이다. 색깔이 새것같이 뽀얗다. 그러면 갈아입은 지 얼마 안 됐구나 생각하는 것까진 좋으나, 혹시 아이가 입을 크게 벌리고 야릇한 소리를 내면서 다가오려 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심히 쫄은 나머지 이게 악몽인지 생시인지 구별이 안 된다 싶으면 가급적 침착해지기 바란다. 그 순간 아이와 떨어진 거리라 해봐야 고작 2,3미터다. 주저하지 말고 그대 쪽이 먼저 냅다 달려가 다이빙하는 동시에 아이의 빤스를 확 내려 보라. 거기에 달려 있어야 할 게 달려 있는지 확인하라. 뭔가 제대로 달려 있다, 그 뿐만 아니라 불알도 있더라, 그러면 아새끼 뒤통수를 몇 대 때리고 방 밖으로 내보내라.


사에키 카야코
귀신으로서 준비해야 할 얼굴이란 자고로...

  우리는 토시오가 자주 이불 속에 나타나는 꼴을 보아 왔다. 그럴 때도 대처 방식은 다르지 않다. 아동성학대를 무릅쓰고서라도 일단 확인할 건 해야 된다. 애 빤스를 움켜줘었는데도 뭔가 잡혀야 할 작은 것이 안 잡힌다, 그러면 기도를 하고 죽음을 각오하시라. 물론 혹시라도 체화된 왜식 수치의 문화가 아주 조금이라도 꼬맹이의 저항으로 감지되면 아새끼 뒤통수를 몇 대 때리고 방 밖으로 내쫓아라. 그런데 사람이 보통 못 나타날 곳에서 처음부터 자신이 진정한 귀십입네 하는 저 같은 꼴로 불쑥 나타나는 여자가 있다면 나로서도 방법이 없다. 성기를 확인하는 일은 바로 포기하자.


CARRIE(2013) - MARGARET WHITE

[1] CARRIE WHITE
  캐리 화이트는 체육시간 뒤 학교 샤워실에서 같은 반 여학생들로부터 탐뽕 세례를 받던 날 염력에 눈떴다. 때늦은 첫 생리와 생리대 다발로 빗장을 풀게 하여 막판에 학급 하나를 초개같이 사를 무시무시한 능력을 미리 각성하도록 하는 도입부다.

  한데 아메리칸 고딩들 누구나 학교의 성교육 캠페인에 따라 책가방과 지갑 속에 각종 피임구를 챙겨 다니며(물론 종종 딜도까지), 수업 시간이 아니라면 학교 어디서건 온통 연애질이며, 교내에 나뒹구는 쓰레기의 반이 쓰다 버린 콤돔들이며, 뽀르노 생산 대국의 국민답게 스마트폰 데이터의 8팔을 카테고리별 야동 콜렉션으로 채워 다닐 뿐만 아니라 그 근엄하다는 수업 시간에조차 교사가 칠판에 잠깐 뭔가를 쓰느라 등을 보일 때면 그 사이 반드시 교실 한구석에선 어떤 식으로든 잽싸게 성행위가 발생하고야 만다는 미식 하이스쿨 괴담처럼 저마다 짝을 지어 하는 성교 실습이 이제 프로급에 이른 작금을 감안하지 않을 수 없다. 학교 근방에 군집한 산부인과의 수익이 성형외과의 높디높은 그 고소득마저 추월하는 그런 세태에 이 하이틴 소녀가 초경이라 하는 성징에 심히 기겁하고 발광했다는 것은 캐리가 앤 설리번을 선생으로 맞이하기 전의 헬렌 켈러였다는 얘긴데, 엄마가 그동안 죽 딸내미를 감금하다시피 집안에서만 기르다가 고3 2학기가 돼서야 학교로 내보낸 게 아닌가 의심스러울 정도다. 학교 변소에서 대소변을 보다가 피에 절은 숱한 각종 생리대를 숱하게 목도해 왔을 텐데 캐리는 그때마다 그것들을 도대체 무엇이라 생각했던 걸까.

  이같이 운을 떼는 것도 모자라 스토리는 심히 얄궂게, 세상에 등 돌리고서라도 제 딸내미 역성만큼은 아낌없이 들어야 할 유일한 혈육인 엄마 마가렛 화이트와도 사이를 벌여 놓고 있다. 샤워실에서 겪은 당황과 울렁증과 굴욕에 대해 포옹과 위로의 눈물과, 육체적 성년을 축하하는 I'm so proud of you!와 같은 생활영어는 고사하고 마가렛은 딸의 월경에 대하여 너같이 태생부터 사악한 것이 왜 생리까지 다 하고 지랄이냐는 취지의 말을 토한다.


  캐리에게 세상은 집과 학교와 등하굣길로 구성되어 있다. 학교는 텍스트북과 모멸의 눈초리로 구성된 고립무원의 왕따 지옥이고, 타인의 등쌀을 하루하루 어찌어찌 견뎌 내고는 무거운 발걸음으로 집구석에 당도하고 보면 마땅히 안식처가 되어 주어야 할 기처에는 시커먼 상복 차림을 한 마녀 같은 엄마와 부적용 십자가와 감금용 골방이 기다린다. 이렇게 우리 미스 화이트를 몰아 넣은 생활 지옥은 지옥도 아니라며 영화는 캐리를 타겟으로 하는 스테이지와 대미 장식용 돼지 피 한 바께쓰를 착착 준비해 간다.


존 밀턴의 시 - "투사 삼손"

  당 영화에서 염력은, 삶에 낙망한 캐리가 홧김에 에라 원한이나 갚고 죽자고, 방과 후면 으레 으슥한 갓길에 차를 세워 책가방을 옆에 두고 2인조 레크리에이션으로서 일과처럼 성생활을 열나게 즐긴 후 귀가해서는 엄마가 차린 밥 처먹고 스마트폰만 만지작거리다 수면에 임하는 남녀 동급생들에게 살금살금 접근해서 등에다 수십 차례 칼빵을 놓는 전략과 체력과 용기 같은 건 불필요한 몹시 편리하고 화끈한 몰살 능력이었다. 그러나 전능하사 "캐리"를 창작하신 스티븐 킹이 소녀 피조물에게 하사하여 얄궂게도 초경에 맞추어 각성하도록 한 이 은사의 용도는 여느 액션물처럼 총칼 들고 설치는 조직적으로 악하디악한 것들을 징벌하는 데 있지 않았다. 가령 캐리보고, 네가 이 세상에 나서 보고 듣고 한 것이 무엇이었더냐고 묻는다면 우리는 이 아이의 눈빛만으로도 답하고자 하는 바를 무리 없이 읽어 낼 수 있을 것이다. 빌어먹을 세상에 대한 실망과 언제까지나 성숙을 모르는 인간들에 대한 환멸. 아니 입을 열어 조근조근, 내 버림 받은 영혼이 물적 족쇄에 따라 육화되어 한동안 인간들 우리에 갇히어 세상을 겪으며 살펴 본 바 이들에게 그 어떠한 가망도 찾을 수 없었음이라 대답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초자연적 파과력이 파리한 염세주의에 뿌리를 두고 눈을 뒤집히게 만들 분노와 커플링할 때 소녀는 악마가 되어 졸업 무도회라는 고교생들의 신전을 무너뜨릴 용의가 있다.


[2] MARGARET WHITE
  딸에 대한 마가렛의 태도를 보자니 생각나는 말이 있는데, 십수 년 전 왜국 지상파 토크쇼에 출연한 어느 여배우가 출산 경험을 두고 한 발언이다. 그녀는 아기가 자기 몸에서 에일리언이 나오는 것같이 징그러웠다며 다른 게스트들로 할 말을 잃게 했다. 어눌한 말투에다 할 말 못 할 말 구별이 안 되는 판단이 전파를 타게 되면 보는 이쪽도 뭐 저런 골 빈 년이 다 있냐, 그게 엄마로서 할 소리냐 싶게 마련이다. 우리는 설사 모친이거나 모친 역할을 한 여자들에 대한 안 좋은 기억이 다소 있다 할지라도 여자들에게 모성애는 모름지기 피할 수 없는 본능이라 배우는 법이고, 아이를 낳은 장본인이라면 설령 아이 외모가 진짜 이티였다 한들 귀여워 죽겠더라며 호들갑을 떨어야 마땅한 법이다. 그러나 비슷한 시기에, 신체와 의복의 관계를 고찰한 와시다 키요카즈의 저서 "모드의 미궁(モードの迷宮)"을 읽고 생각을 고치게 되었다. 즉 방송용으로 각색되거나 여과되지 않은 그 여배우의 체험적인 직설이 산모의 감각에 관하여 괴이하나마 일말의 진실을 담고 있지는 않았나 하는 것이다.


  흔히들 하는 말로, 여자들은, 불알이 털로 덮이면서 성기가 소변 외에 누르튀튀한 콧물 같은 액체를 묘한 흥분 끝에 방출하게 되는 머슴애들의 성징 현상 따위에 비할 수 없는 신체적 변화와 심리적 변화를 겪는다(고 들었다). 젖을 생산할 필요가 없는 긴긴 세월을 육중하게 출렁이는 유방 및 브래지어를 달고 살아야 하는 처치도 상당한 고충일진대, 폐경을 맞기까지 평생 주기적으로 한 달 중 몇 날 며칠을 성기에서 피를 보고 생리통을 겪게 된다는 것은 남자들에게 제 몸에서 일어날 현상으로서는 상상하기 힘들다(가령, 귀두에 벌겋게 피가 몰려 발딱 선 채 생리 기간처럼 사흘에서 일주일 간 발기가 지속된다고 가정이라도 해 보자. 해면체의 일정 체적을 유지하려는 고혈압 때문에 자지가 아파서 신경질적인 성향을 보일 것은 물론, 시도 때도 없이 실핏줄이 터져 피오줌을 찍찍 싸게 되는 고로 좆대가리에다 둘둘 말아 둘 두루마리 휴지를 휴대하거나 거기에 덮어씌워 둘 골무형 생리대 같은 것이 있어야 할 게다). 심지어, 남자들이야 한평생 생각조차도 못 할 일이고 그럴 몸도 아닌 얄궂은 사실로서 여자들은 자신의 몸 안에서 사람 형상을 한 것이 숙주의 영양분을 쪽쪽 빨아먹으며 자체 생장 발육하여 때가 되면 저렇게 알아서 큰 머리부터 디밀고 나오는 사태를 경험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리 나와서는 그것이 예정조화같이 이미 부풀게 해 놓은 수유 기관에 젖이라는 체액을 요구하고 또 빨아먹는다.


  사람에게서 사람이 나는 것. 엄밀하게는 어찌하여 자기로부터 타인이 생산되는 것인지, 낳은 본인이 봐도 신생아가 징그러웠다는 그 여배우의 불편한 감정을 좀 더 극단으로, 아니 당 영화처럼 아예 호러물로 밀어붙이면 마가렛 화이트의 처지가 되는지도 모르겠다. 이 여자는 악마가 자기 자궁에다가 정액 한 사발을 싸지르고 튀었다고 보았다. 캐리가 이 세상 것이 아닌 것에서 왔다 하여 이처럼 오컬트적인 기원을 세팅한 것은 무엇인가가 음부 속으로 들어와서 포궁 기관을 빌려 인간 형상을 갖출 때까지 성장한 다음 세상에 출현하는 데 자기 육체가 도구같이 쓰이고 만 낯설음과 그 불결한 괴기스러움을 전하는 메타포로서였을 것이다. 모체와 유체의 유기적 관계를 흉측하고 고약하게 표현한 것이 있다면 크로넨버그의 86년 작 THE FLY가 그중 하나일 텐데, 베로니카가 파리의 유전자가 몸에 섞인 과학자 세스 브런들의 씨를 잉태했을 때 꾼 태몽이자 여성적 불안으로서의 무의식이었던 악몽은 제 산도를 막 빠져나온 거대한 구더기를 목견하는 것이었다. 이렇듯 악마나 집파리 등의 흉물스러움의 파종자로서 남자가 여성의 몸에다 무얼 뿌려 놓았는가, 향후 과연 무엇이 태어날 것인가로 초조와 불안은 항상 여자 몫일 수밖에 없다. 특히 마가렛의 경우 악마에 의한 강간을 시사함으로써 사악한 종자가 강제 주입되어 배태되었다 할 만한 장기성(臟器性) 노예 상태에 있었다. 겁간에 의한 수태는 오로지 타적인 존재를 위한 배양 장치 내지 기관으로서 자궁의 약자적 숙명을 더 두드러지게 암시한다. 따라서 성욕으로 인한 발기의 마초적 공격성이 여성에게 성적 쾌락 유무와는 무관하게 임신할 개연성을 짊어지게 함으로써 마가렛의 정서적인 사연이 딸에 대한 어떤 행위를 일으켰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그녀는 마귀의 강간 행위를 결단코 재수 없는 태몽쯤으로 가벼이 여기지 않았으며 뱃속에 든 것이 악마의 씨라는 독실한 신념에 그것이 자궁을 빠져나오는 즉시 탯줄을 잘랐던 가위로 핏덩어리를 죽이려고까지 했다. 그러나 막상 처단하려던 찰나 차마 그러지는 못했을 만큼 너무나 사랑스러운 딸이기도 했다는 것이 이후 캐리에 대한 보호와 학대의 경계를 모호하게도 만든다. 모성애가 뚜렷하게 따듯한 말이나 포옹으로 표출되는 법이 없으나 이 같은 쌀쌀함은 그래도 어쨌거나 사랑스러우니 딸을 키우기는 하되 늘 표독하게 훈육하는 방식이 최소한 딸을 죽이지 않아도 될 타협점이다.

  하면 성교육을 거르는 방식으로 악으로부터의 수호 행위가 학대를 수단 삼았을 때 결과적으로 캐리는 어떤 식으로 성장하던가. 당당한 어깨와 치켜든 콧구멍을 갖지 못한 쪼그라든 저자세와 거무칙칙한 복장이 이 소녀의 일상적인 이미지요, 고교를 졸업할 그 나이가 되도록 멘스가 뭔지를 몰라 생애 처음 가랑이 사이로 흐르는 피를 보고 경악하여 폴짝 뛸라치면 같은 반 여학생들이 똥닦개용 신문지 뭉치를 던지듯 집어던진 생리대나 맞고 다니는 꼴이 된다. 이 꼴이 넌지시 상징하는 것은 기실, 네 속에 뭐가 잉태될지 모르니 딸아 너만은 제발 임신 같은 건 하지 말라는 걱정이 투영된 성적 거세의 결과라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덧붙이고 싶다. 마가렛의 처지를 생각하면서 임신 경위에 관한 한 그것이 사실 요셉의 아내 마리아의 처지에 대한 거울상이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는데, 초자연적 남편의 자녀가 초자연적인 능력자였다는 결론에서 단순히 그렇기도 하거니와, 그보다 캐리가 자궁이 아닌 저 밖 어디로부턴가 떨어지고 솟아나는 식의 설화적 방식으로 세상에 편입되지 않았다는 점이 중요하다. 어찌하여 그 신성하다던 초월적 삼위일체조차 성체(成體)의 이목구비와 할례 받은 성기를 장착한 육신으로 구름을 타고 강림하거나 하지 않고 한낱 인간이었던 여자의 양수 속에서 배양되었다가 질구를 열어 세상 쪽으로 그 굵은 머리를 디밀고는 마리아로 하여금 음부가 찢어지는 해산의 고통을 맛보게 했는가. 또, 동네 사람들한테 임신을 들켰을 때 혼례 후에도 일 년 동안이나 남편과의 동침을 금하는 유대 관습 때문에 돌에 맞아 죽을 뻔했거나 적어도 날이면 날마다 따가운 눈총을 받으며 지내던 판국에 마리아는 배 속에서 메시아라는 이물이 자라는 동안 과연 이 수태가 너무나 영광스러운 나머지 노상 째지는 기분이었을까. 구세주의 탄생이 두려웠던 헤롯이 베들레헴에서 출생한 두 살 이하 유아들을 모조리 참살했다는 것을 알고도 그 대량 학살의 저주를 부른 임신이 과연 더할 나위 없는 축복이었을까. 이같이 동정녀의 장남은 무고한 죽음들로 태어났고, 소생이 보기에 당 영화는 마가렛의 잉태를 예로 들어 그 심리를 뒤틀어 표현한 마리아의 악몽 같은 면이 없지 않았다.




쌍룡회 - 노래하는 장만옥

[1]
  당 작품은 일란성쌍생아의 부분적인, 그리고 운동계의 원격 근운동적 평행세계관을 기조로 하고 있다. 건반을 두드리는 피아니스트 "마 야우"의 손가락과 건달 "복밍"의 마샬 아트가, 또 성적 충동이 쌍방으로 전이되는 초능력물이라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홍콩영화의 황당무계 무협물에 길들여져 있었던 관객은 동일한 유전 정보의 확장된 표현형이라는 암묵적 억측으로 두 신체의 원격 싱크로를 용인하고서 이 얄궂고 괴이한 파라노멀 액티비티를 즐긴 게 분명하다. "아시아"의 수퍼스타의 최성기가 서서히 끝나 갈 무렵이기는 했지만(미안한 말이나 소생이 보기에 그의 전성기는 "취권 2"로 끝났다), 개봉 당시는 두 성룡의 공동 주연, 성룡의, 성룡에 의한, 성룡을 위한 영화를 얼마든지 그런 식으로 흐뭇하게 맞아들인 시대였던 게다.

  생각건대, 하늘을 찌르는 듯한 성룡의 국제적 명성을 감안하면 당시 홍콩영화계에서는 어쩌면, 정통 경극에서 출발한 배우 겸 출중한 연출가이자 우리 자신이 분명히 목도했었듯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곡예 전문 스턴트 무술가, 게다가 노래까지 부르는 뮤지션이기도 했던 그의 다면적인 정체성 및 재주를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 하는 모종의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었을 법도 하다. 각기 다른 감성과 능력을 가진 성룡 원과 성룡 투가 짜고 법치의 틈새에 기생하는 조폭들을 조지고 섬멸해낼 뿐만 아니라 그 바쁜 가운데서도 어여쁜 색시들까지 건지도록 한다는 기획이 무리일 리 없다는, 즉, 유인원 손오공이 걸핏하면 귀하디귀한 머리털을 한 움큼 뽑아서 하는 짓이나 나루토의 소위 그림자분신술같이 무한정 분열하여 설치고 다녀서 될 일도 아니지만, 그 시대의 수퍼스타 성룡을 많이는 아니더라도 둘로나마 쪼개서 따블로 표현하여 영화적 사치를 누려 보고자 하는 기획, 적어도 그런 기운이 조성된 김에 아예 당 영화가 탄생된 게 아닐까 하는 추측을 해 본다.

  여하튼, 가만히 보면서 새삼스레 느끼게 되는 건 당 영화의 짜임새 있는 육박전 합과 편집 기술만큼은 지금 봐도 대단히 정교하다는 것이다. 그린 그래스 감독의 연출 방식이 유행시킨 실전 격투기가 아무리 작금의 한국 영화계에까지 침투해 있다 한들 사실, 신체적 액션에 관한 한 선구적으로 새로운 액션 수준을 알리며 써먹을 수 있는 건 80년대 초중반에 이미 다 써먹었다는 감마저 없지 않다. 이 때문에 이제 지나간 그의 민첩한 옛 모습만을 추억할 수밖에 없는 지금이 심히 서글퍼진다마는.

[2]
  당 영화를 또 본 것은 약 사오 년 만인 것 같은데, 다시 본 데는 이유가 있다. 80년대 홍콩영화 주제가들 중 혹시 모르는 좋은 노래가 있나 싶어서 여기저기 검색하고 그러다가 장만옥이 기쁨에 겨워 열창하는 이 장면을 우짜다가 보고 있노라니, 처음도 아닌데 이것이 새삼 감동스러웠다.


아, 게다가 이 누님이 이날따라 왜 그리 예뻐 보였던지...

  무론 건조한 시선으로 볼 이유가 전무했으므로 홍콩영화를 80년대의 추억이라 생각하던 소생으로서는 늘 귀엽다고 생각했었고, 또 최소한 장만옥을 홍콩영화 팬으로서 그렇게 보아야 하는 건 의무라 생각했다. 그렇다 한들 미인이라 여긴 적은 결단코 없었다. 그러나 이번 감상으로 바뀌었다. 아니, 영화가 제작되었던 91년도 그 시절 20대 후반이었던 이 여배우의 모습이 지금의 내 나이 탓에 예뻐 보인 것에 불과한 겐가. 그렇게도 생각해 봤다.

  그런 심리가 전혀 없었던 것 같지는 않다. 그래도 그 이상으로 인상적이었던 이유는 아마, 딱한 집안 사정으로 대륙에서 홍콩에 건너와 유흥업소 가수가 된 바바라, '여러분 이제야 내 사랑을 찾았어요! 어머 지금 내가 꿈이라도 꾸고 있는 게 아닐까요? 별안간 세상이 달라 보이니 말이에요!'와 같은 여주인공의 심정이 저 해맑은 미소에 어린 탓이다. 그게 심히 순수하게 보였기 때문이다. 왜 이렇게 느끼고 만 것인가를 또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그것은 참담하게도 다시 경험할 수 없는 그 시절 추억을 기억에 박제하고서라도 그냥 떠나보낼 수 없는 상심과 연동되어 있는 게 분명하다. 경박한 영화였던 만치 그냥 그렇게 히힛 낄낄 웃어 넘기던 시대적 분위기, 그리고 이처럼 소비적 오락거리였던 홍콩영화의 지상 명령이 비실비실해질 정도로 세월이 흘러, 또 다른 한편에선 그 황당무계 코미디가 언제부턴가 더 이상 가벼운 코미디에 머물지 않게 되었다는 점이 씁쓸함의 반증이 된 셈이다. 달리 표현하자면, 이번 감상 중에 장만옥이 부르는 노래, 이 알아들을 수 없는 "지노천황(地老天荒)"이 어느새 진추하의 이를테면 "Little Bird"와 같은 수준에 올라와 버린 것이다.


  "통섬" 역을 맡았던 이지(利智)에 대해서도 이제 와서야 호감을 가질 수 있었는데, 그보다 우선 아래의 동영상을 통해 만옥이 누님의 표정을 음미해 보시라. 23년 전 저 시절 성룡의 윙크 역시 어딘지 가슴을 찡하게 하는 데가 있다.



Cape Fear - 신의 자격


I am like God, and God like me.
I am as large as God, He is as small as I.
He cannot above me, nor I beneath Him be.
Selatius, 17th Century.


  독일의 종교시인 Angelus Silesius(1624~1677)의 시구를 일부 인용한 듯한 이 장면은 "케이프 피어" 개봉 당시 많은 관객들에게 대단히 괴이한 인상을 남겼을 터인데, 윗대사는 알다시피 맥스 케이디(Robert De Niro)가 샘 보든(Nick Nolte)이 고용한 해결사들에게 반격을 가하여 퇴치한 직후 목청을 가다듬어 "자신의 정체"를 밝혀 이르는 말이다. 당시 나도 기이한 느낌을 받았었다.

  이천 년 전의 나사렛 사람을 믿는 자들에게는 망령되고 참람스러운 모독이나 다름없고, 사막의 신과 그의 얄궂은 첫 번째 데칼로그를 받들지 않을 만큼 지혜 있는 자들에게는 단지 "광기"라는 진부한 낱말 하나면 족하고도 남을 저 말이 왜 그리도 기이했을까? 또, 그 표현이라는 것이 왜 저런 식일까?

  우선은 크기 및 위치 표현이 <Max Cady = God>라는 단적인 등식꼴 내용에 대하여 압도적임을 한눈에 알 수 있다. 내용이 아니라 표현에 지각이 쏠리고 문장의 정적 평형구조 깊숙이 크기의 늘고 주는 역동을 단번에 감지하고 마는 것이다. 따라서 그놈의 기이한 느낌은, 널리 유포된, 증거 없는 정립, 소위 <신은 크고 인간은 작다>에 반동적인 저 표현 자체의 확대 및 수축이라는 운동성에서 비롯되었다고 봐야 옳다. 그 운동성의 성취는 이를테면 <I am as large as God>만으로 족하지 않다. <he is as small as I>와 대구를 이루어야 함은 물론, 대구로 양자 본디의 크기를 암시할 효과도 필요하다. 이로써 사람의 small은 확대되고 신의 large는 수축되는데, 확대와 수축은 제3항, 즉 동격(as~as)이라는 한 기점을 향해 커지고 작아진다. 한데 "동격"이 왜 발생하느냐가 문제다.

  large는 어디까지나 large의 본분을 유지하고 small 또한 마찬가지다. 그렇지 않고서는 작아진 large는 어디까지나 small일 뿐이고, 커진 small은 어디까지나 large일 뿐이다. 이 점은 large의 신이 인간의 크기로 수축되는 것과 small의 인간이 신의 크기로 확대되는 것에 명백히 배치된다. 그러나 large 및 small 각각의 수축 및 확대와, 그 본디의 크기라는 것의 불합리한 간극에 대하여 기뻐하거나 실망할 준비를 하며 그렇게 미리 불연속을 전제할 필요는 없다.

  어떻게 신을 초월적 위치에서 끌어내려 이처럼 물적 크기의 이미지와 연동하게 하는가? 양극단에 있다가 저 동격에 이르고자 하는 맹열한 열망, 이 운동하는 large와 small 레토릭의 저의는 무엇인가? 우리는 다음과 같은 유언비어성 관념에 익숙지 않았던가? "신은 크기를 초월하여 존재하므로 본디 가늠할 수 없고, 무소부재하므로 상하 좌우 등의 변동하는 특정 장소값에 국한하는 것 역시 온당하지 아니하다!" 알려고들 하지 말라는 경고문같이 구는 이러한 사념은 절대적 large와 절대적 above에 속하는 관념들을 제시한다. 물론 "절대적"이라 함은, 하위 존재와 단절되어 있으므로 그것과 연속적이지 않고 small의 피조물로서는 절대로 못 오를 나무라는 뜻이다. 그러나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smalllarge>든 <largesmall>이든 크기는 연속한다.

  한데 어찌하랴, 천상에서든 어디서든 부동의 지위를 견고하게 굳히고 있을 전능자는 small들의 입술과 말과 관념을 빌어 경배받아야 할 운명인 것을!!!

  피조물들의 찬미를 누리고자 한 그 순간부터 그는 <large small>이라는 맞닿은 위상적 연속성의 덫에 걸려들어 small들의 연상 게임에 노출되고 만 것이다. 초월자의 초월은 small들의 상상을 초월하는 어디까지나 절대적 단절을 의미했을 터였다. 상상을 불허하므로 매개적인 상상은 단지 내적인 매개적 우상을 만들어 내는 것에 지나지 않을 터였다. 지존하신 이가 하늘에 계시면 우리가 상상하는 하늘은 필경 매개적인 허구임이 분명할 터였다.

  그런데 그가 모든 신들보다 위에 존재한다고 우리가 상상하는 그 순간, 신의 계급의 기하학적 최고위는 필경 최하위의 직분과 연속적일 것이다. 어디선가 large가 small에 맞닿는 지점이 생기고 마는 것이다. 또, 임마누엘이라 하여 임재하면 그가 우리에게로 온다는 말이고 신의 위상 변화를 일러 주는 것이며 동일성의 일자적 비분산 개념에 노출되어 그가 부재하는 곳을 암시하고 마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혐의가 부당하다 한들, 그는 만사와 초월을 제쳐 놓고서라도 우선 찬미를 받아야 직성이 풀리는 입장이 아니던가. 무소부재하는 이는 적어도 찬양과 기도를 받을 시에는 무소부재를 철회하고 단절의 자물쇠를 한정 해제해야 할 처지다.

  한 걸음 더 나아간 반동자의 통성을 가정할 수 있다면, 질레지우스의 기도를 일부분 표절하여 심하게 늘이고 비뚤게 각색한 다음의 간증처럼 반동할 수도 있다 :
  아무리 위대한 신일지라도 나를 통하지 않고 내게로 임할 전능자가 어드메에 있느뇨? 나로 하여 존재하기를 멈추게 하라. 아무리 위대한 전지자일지라도 내가 존재하기를 멈추고 재와 같이 사라지는 날에는 저 자신을 밝히어 진리를 드러낼 곳을 정녕코 잃고 말리라. 나를 통하지 않은 영원한 진리 또한 나와 영원히 무연하리라.

  이것이 나를 깨우쳐 이르기를, 하나님은 이러한 피치 못할 사정으로 나를 사랑하시니라 하였더라.

  그러므로 나의 존재야말로 신이 임할 유일한 성전이요, 저의 은밀한 계시가 탄생하는 곳이요, 찬미할 입술을 창조하는 태초의 찬송이요, 저와의 존재론적 선계약의 표징이며, 저의 진리가 빛을 발할 신성한 무대로다. 신은 나를 통하여서만 현전하니, 나의 검지를 들어 하늘과 샛별과 진리를 가리키며 나와 함께 신들메를 매고 나의 두 다리를 통하여 걷고 또 걸어 이윽고 광야에 이르매 기처에서 저가 나의 배로 주리고 나의 살갗으로 사막의 뜨거운 태양에 쬐이며 밤 추위를 타는도다!

  추측건대, 맥스 케이디는 신에 대한 자신의 존재값이 유일성이고 이것은 신의 현전 채널과 동일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더 이상 환원 불가능한 유일성은 나에 대한 나만의 직관적 인칭이므로 신을 제외한 타의 직각을 원천적으로 불허한다. 신은 천 명의 나를 만들어도 천 명 각각의 유일성을 인식하고 능히 분별할 줄 알아야 하고, 그가 나를 찾아 임하고자 할 때 동명이인들과 닮은꼴들에 눈이 멀어 허탕을 치고 다니는 혼미한 주제꼴을 보이는 일이 없어야 함이 전지자의 기본 자격이다.

  그런데 신에 대하여 왜 나의 유일성이라는 것을 들고 나와야 하는가? 그 이유는 간단하다. 나는 나를 벗어날 수 없는 고로 나는 나에 대하여 부재할 수 없다. 그리고 과거는 이미 가고 없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아 없으므로 다른 누구도 아닌 나는 비재(非在) 가운데 현재만을 살고 있는 셈이다. 이 단적인 사실은 나를 유한자로 규정지을 뿐만 아니라, 역설적이게도 무궁한 세계는 물론, 무한자마저 그곳에 내몰리고 쏠리어 드러날 수밖에 없는 방식으로 현상하는 일종의 중심점 내지 특이점까지 규정짓는다. 경치의 미악과 시선이 동맹관계를 맺듯 태산이 과시하는 우뚝함의 위세와 가파름의 강퍅함은 그 특이점을 통하여 경험될 수밖에 없다(경험이란 항시 어느 특이점에 관한 이야기다). 아무리 위대하고 무한하다 한들 무한자가 나에게 자신의 콧구멍을 보이고 그 위용을 자랑하려거든, 나 자신과 현재를 벗어난 일도 없고 앞으로 벗어날 수도 없는 미약한 나 유한자에게 무한자도 미약하게 깃들어 경험되어야 마땅하다. 그것이 신의 숙명이다. 따라서 무한자의 자존심은 유한자만큼 작아지고 맥스 케이디의 정신은 신의 교만만큼 커진다.



All is lost ― 조난과 일상


  폭풍우를 예감하고 면도를 하는 이 장면을 보고 있자니, 옛날에 출장 강의를 하던 타교의 어느 선생이 정신과 똥오줌의 상관관계를 지적한 말이 생각났다. 부친이 노망이 들었는데 똥오줌을 못 가리더라. 그런 지경에까지 가니까 정신 줄까지 놓더라 했다. 명색이 정신과의인지라 아들은 부친이 대소변 정도는 가릴 수 있도록 무던히도 애들 썼다고 했다. 그러자 나갔던 정신이 조금은 돌아오더라 했다.

  우연히라도 망망대해를 직접 본 사람은 알겠지만, 그것은 실로 망망하고, 또 가만히 그 망망한 넓이를 보고 있노라면 때로는 해방감이 아니라 고립감 및 진정한 자기 과소평가를 정녕코 맛보게 만드는 곳, 저런 데 홀로 남겨지게 된다면 하고 반드시 한 번쯤은 상상하게 만드는 그런 곳이다. 그 감상에 절망이라는 고독이 살짝 깃들기는 하지만, 안전한 선상에서야 어디까지나 안전한 절망이어서 고독한 낭만에 젖게도 한다. 그러나 조난 상황은 그런 사치스러운 기분을 섬멸한다.

  요트 옆구리에 난 구멍을 허접스럽게나마 땜빵은 했지만, 주인공은 저 멀리 퍼런 수평선을 보고 그 땜빵 효과도 다 소용없을 일기를 감지한다. 무전 장치가 바닷물 먹고 고장 난 동안 바다가 고요한 인상을 접고 사나워지려 하자 이때쯤 위기 의식은 그의 머릿속에서 해상 여행에 대한 관조적이고 음유적인 감상과 황혼의 사색적인 고독을 남김없이 완벽하게 걷어 냈을 게다. 한데 그런 와중에 물통을 들어낸 다음 대뜸 면도를 시작하는데, 처음에는 저게 뭐하는 짓인가 싶었다. 겉치장이 필요 없는 광막한 대양 한가운데서 태평스럽게 아침 출근 채비를 하는 것도 아니고. 그러나 이내 동요을 가라앉히려는 행위로 보였다. 평정을 찾고 정상성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면 무엇이든 좋았는지 모른다. 오늘은 오늘의 일과가 있고, 일상의 형식은 일상적인 정신을 불러일으키는 마음의 끈이었던 게다.

  예상은 기우로 끝나지 않고 조난자는 약간의 일상을 영위하던 그 공간마저 곧 잃고 만다. 조난에서 바로 구조로 이어 가지 않고 조난 상황을 끝까지 밀고 나가는 면에서 영화는 바다의 망망함같이 길기만 하고 생존 투쟁은 외롭기만 하다. 조난자가 오로지 구조를 희구하는 조바심에서는 수평선 끝자락에 가라앉는 노을빛 로망 같은 것이 눈에 들 리도 없다. 그래서인지 영화는 수면과 수중을 나누어, 그의 시선이 못 미치고 그의 정신이 음미하지 못하는 곳으로서만 바닷속을 잠깐잠깐 보이고 지나가며 조난자의 낙담한 기분과 바닷속의 아름다움을 철저히 분리해 놓는다.



About Time ― X의 시간 연애담

[1]
  시간 여행을 가지고 부자간의 낭만을 이렇게 돈독히 할 수도 있구나 싶었다. 또, 시간 이동 능력이 남한테 강탈당할 일이 없이 유전적이고, 그 시간 이동 폭을 여행자의 과거에만 한정시킨 면은 새롭다. 그런데 영화는 이같이 엄청난 판타지 요소를 투입해 놓고 오로지 연애와 가족과 주변 일에만 집중하고 있다. 정말이지 일상적이다. 그리고 등장인물들은 대체로 선하다. 특히 시간 여행이 가능한 자들에 대한 성선설이 이보다도 더 강력한 각본은 있을 수 없다. 저런 능력만 있다면 무슨 짓인들 못 하랴. 하지만 그들은 추악한 것과 불쌍한 것이 존재하지 않는 대체로 선한 태평천하에 산다고 믿으며, 가족과 사랑만 있으면 된다고 로또도 안 산다.


너무 복잡해지니까 아버지와 아들이 시간 여행 중 서로 마주쳐서 생기는 따블 여행 문제는 여기서 빼두자

  팀 레이크는 확연하게 두 부류의 삶, 즉 현재 인생과 과거 인생을 가지고 있다. 과거 인생은 현재 인생의 수명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 듯하다. 다소 나비 효과에 대한 불안은 있겠지만, 자유자재로 특정 과거 시점을 골라 거기에 가 있는 만치 더 살 수 있고 그래서 아예 과거에서 살기를 많이 반복하면 장구한 세월을 살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리하여 좋았던 시점을 골라서 더 자주 즐길 수 있으므로 그에게는 과거 인생이 도리어 메인 인생이 될 수도 있다(숱한 시간여행물 가운데서 이 세팅 또한 참신하다). 따라서, 매리에게 단 한 번뿐이었던 팀과의 첫 섹스를 그가 세 번이나 연달아서 즐겼던 것처럼 그때 그 수줍은 기분 및 아내 몸의 순도 높은 신선도가 그리울 때면 언제고 다시 가서 즐길 수 있다(물론 한낱 오르가즘과는 비교도 안 되는 양심적 대가를 치룰 각오만 있다면).

  저런 짓이 가능한 것은, 현재의 정신과 정서와 지식을 가지고 과거의 모습(외모 및 복장)으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완벽한 카무플라주라 아니할 수 없다. 과거에서 또 다른 자신의 모습을 목도하거나 자신과 맞닥뜨리는 일이 애초에 없도록 하고, 가족, 친지, 친구 등 오로지 주변 인물들과의 로망과 애정 어린 생활감을 위한 장르상의 설정인 듯한데, 한편으로는 편리하나, 다르게 보면 불편한 구석도 있다. 덩치가 작아 누군가에게 얻어맞고 다녔던 어린 시절로 돌아가 앙갚음이라는 과거 수정 작업이라도 할라치면 어린 몸으로 그놈을 혼내 주려다가 도로 맞고 눈이 귀 쪽으로 돌아가는 수가 있다. 그렇다고 그깟 일이 문제가 될까. 수정하면서 즐길 과거는 많고 시간은 남아돈다.

[2]
  그러나 당 영화에 대해 소생이 하고 싶은 이야기는 저런 게 아니다. 관점을 바꾸어 이렇게 보면 어떨까. 어느 날 팀은 아버지가 왜 이토록 관대하고 인자한 인상만 가지게 되었는지 알게 된다. 그 자신, 시간 이동을 통해 여러 과거에 관여해 왔듯이 자신과 아버지의 관계 역시 수없이 끊임없이 수정되어 왔다는 느낌을 받은 것이다. 물론 수정은 좋지 않았던 관계에 대한 수정이다. 그리고 왜 아버지가 슬하에 자식을 둘까지만 두고 있는지 그 까닭도 알게 된다. 종종 과거로 가서 죽은 할아버지와 아직도 만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 부계 조상들이 유구한 세월을 대대로 이런 식으로 살아왔으리라 생각하면, 이 가문에 다소 이상한 정신사적 내력이 있으리라는 느낌이 안 드는가.

  팀이 세 번째 자식을 낳으면 두 번 다시 죽은 아버지를 과거에서조차 못 만나게 된다고 했다. 아버지와 함께했던 장소로는 이동 자체가 안 된다는 뜻일 듯한데, 이렇게 되면 팀은 엄청난 양의 이동 가능한 과거를 잃게 된다. 그러나 만약에 이것이 종전처럼 과거로 되돌아갈 수는 있되, 그 과거 속에 가족 중 아버지만 부재한다는 뜻이면 어찌 되는가. 본가의 식탁에 둘러앉아 저녁 식사를 하며 담소를 나누는 엄마, 여동생, 외삼촌 들에게는 아직 건강하게 살아 있고 그곳 식탁에 자리하여 역시 담소를 나누고 있을 이 가장의 존재만 아들 눈에 누락되어 있다면 말이다. 코미디 내지 공포영화가 된다. 한편, 시간 이동을 매리의 입장에서 보면 이야기는 또 달라진다. 남편에 의해 자신의 과거가 수없이 끊임없이 수정되어 왔고, 지금 그와 마주하고 있는 바로 이 "현재"까지도 몇 번이고 조작된 것이었다고 깨닫는다면 그 순간 아마도 심히 전율했을 게다.

[3]
  가만히 생각해 보면 당 영화는 눈 감고 두 손에 힘주어 원하기만 하면 주인공의 기억이 바로 눈앞에서 현실이 된다는 참으로 이상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회상과 현실의 경계가 없어 회상하기만 하면 곧 눈앞에 펼쳐지는 꿈 속의 현실과 유사하다.

  영화 대사에 의하면 시간 이동이 가능한 장소는 "과거에 실지로 가 본 장소"에 한정한다고 했으니, 가 보았다는 사실은 기억되어 있는 사실이고 따라서 가 본 기억이 없는 장소는 못 간다는 뜻으로 들린다. 이로써 과거를 주인공 시점의 주관적 기억이라 정의 가능하다. 한데 어느 과거로 가는 순간, 팀의 주간적 시간 배열은 재정렬된다. 그 과거는 더 이상 기억이 아니고 눈앞의 현재가 되며 이 시점에서 출발점으로서의 현재는 미래다. 그러면서도 팀이 과거를 현재로서 경험하고, 또 이 과거를 이미 가지고 있던 기억으로 추체험하는 동시에 이 시점에서 그는 아직 실현되지 않은 현재(미래)의 기억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대단히 기묘하다. 과거의 어느 지점에 가든 그의 경험이 멈추지 않고 계속 흐르므로, 그가 지금 경험하며 지금 존재하는 곳을 그의 유일한 현재라고 해야 되기 때문에 이렇게 시간들이 뒤섞이게 되는 것이다. 요는 객관적 시간의 질서가 아니라 시간 여행자의 주관적 시간을 중심점으로 잡아 두어야 한다는 것인데, 이렇게 따라가다 보면 그가 마치 유체 이탈하여 이 몸에서 저 몸으로 자신의 각 시기별 육신을 갈아타고 다니는 듯이 보이기까지 한다. 당 영화가 시간 여행의 절대적 시발점으로 잡고 있는 "현재"조차 팀이 현재의 몸을 입고 있는 시기적 시간과 다를 바 없어 보이니 말이다.

X가 믿고 있는 시간적 세계관 및 일원론적 아이덴티티
오로지 이 노선을 따라가야만 연애담이 연애담으로 보인다

  그러면 당연히 이런 의문이 생긴다. 즉, 시간 속을 나풀나풀 이동하여 귀신처럼 빙의하고 돌아다니는 저것의 정체가 대체 뭐였느냐 하는 의혹이다. 주인공에게 감정 이입하고 그의 시선과 인격에 동화되어서 그렇지, 실상 우리는 괴이한 것을 친숙한 것으로 상대하고 있지나 않았는가. 여기서 저 괴이한 존재를 편의상 일단 엑스(X)라 해 두자. 팀 레이크와 엑스는 동일하나 결코 동일하지 않다. 엑스는 자신을 팀 레이크라 믿고 있고, 자신이 사는 통일된 시간과 세상이 유일한 세계라 믿고 있다. 세계의 구성원들이 거의 동일하게 보이므로 그는 자기가 시간 여행으로 일으키고 다니는 나비 효과를 그 유일한 세계에서의 부분적인 파장 정도로 여기고 있다.

  결과는 "버터플라이 이펙트" 시리즈에서처럼 호러스럽다. 과거에 가서 기억의 동선을 따라 정확하게 행동하기란 불가능하다. 이 균열의 결과가 나중에 나비 효과로 나타난다. 그런데 그것이 그런 효과로 나타나는 과정에 대한 기억이 없어 깜짝 놀라는 장면이 나온다. 엑스가 여동생을 위해 과거의 무언가를 수정하고 돌아왔을 때, 그는 그간 키워 온 딸 대신 듣도 보도 못한 아들을 보게 된다. 딸이 아들로 바뀌어 성장하는 과정에 관한 기억이 통째로 날아간 것이다. 그러나 아들을 처음 보더라도 이 아이를 낳아 길렀던 기억과 정을 천천히 떠올리는 장면이 나올 만도 한데, 전혀 나오지 않는다. 게다가 얄궂게도 이 현재 시점에서 존재하지도 않는 딸에 대한 기억만은 여전히 보유하고 있다. 문제는, 엑스 스스로 자기 자신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 바로 그 팀 레이크가 아내 매리와 함께 딸과는 전연 별개의 생명체인 그 아들을 애지중지 길러서 그만큼 키워 놓았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아기는 엑스를 아빠로 인식하고 방긋 웃었다는 사실이다.

  기억 속의 딸과 기억에도 없는 아들. 낳아 기른 '기억'이 없으니 아들에 대한 정이 순식간에 솟아날 리도 없다. 영화에서는 엑스가 기억과 존재와 애정을 동일시하고 그 이전으로 돌아가 원래의 기억과 사태의 질서를 다시 맞춘다는 식으로 가차 없이 아들의 존재를 말소해 버리지만, 그런 식으로 간단하게 해결할 문제가 아니다. 위에서 시간 여행자를 별도로 "X"라 한 이유는 여기에 있다. 그가 정말로 팀 레이크와 동일인이었더라면 그는 아들에 대한 정을 기억해내고는 과거를 고칠 것이냐 말 것이냐를 두고 심히 고민하며 절망했을 게다. 아니, 기억이 없더라도 이게 아빠로서, 최소한 사람으로서 할 짓이냐며 입에 두통약 털어 넣고 수많은 밤을 철야하면서 기나긴 윤리적인 갈등 정도는 겪었어야 했다.

  평행하는 다른 차원에서 또 한 쌍의 레이크 부부가 그 아들을 잘 키우고 있을 것이라며 문제 될 것은 없다고 가정할 수는 있다. 그렇다 한들 엑스는 여전히 엑스로 남을 뿐이고, 여러 시간의 줄기 및 여러 차원을 넘나들며 팀 레이크라는 정체성으로서만 출몰하면서도 팀과 동일하지 않다는 데 변함은 없다. 그리고 그가 나비 효과를 일으켜서 또 다른 차원이 생겨날 때마다 드는 존재의 비용이 지나치게 막대해지는 문제와 아들 소거 문제가 영화 분위기를 깰까 봐 각본은 그런 복잡한 것을 건드리지 않는 방식으로 엑스 개인의 신출귀몰한 로맨스 구성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다.

  과거에 자주 가면 갈수록 더 불어나는 결과란 어쩌면 기억 속에 난 저런 구멍들뿐일 것이다. 10살 때로 돌아가서 과거의 뭔가를 잘못 건드린 단 한 번의 실수가 그 시간을 기점으로 모든 것을 뒤바꾸어 놓는 수가 있다. 현재로 귀환했을 때는 그 10살 때부터의 기억이 이미 통째로 존재하지 않는 수가 있다. 고로 가령 지금 25살이면, 자신이 무엇을 하고 살았는가에 대한 15년간이라는 커다란 기억의 공백이 생겨 버리는 것이다. 또 한 번 강조하지만, 그러고도 같은 시간 길이를 살아온 과거의 기억은 여전히 가지고 있다. 이는, 나비 효과로 이렇게 변화무쌍해질 수 있는 사태와는 달리 변하지 않는 것을 내포한다. 말하자면, 엑스의 기억 축적이다. 그러나 그 기억들은 언제든 졸지에 부재하는 것들의 주마등으로 전락하는 수가 있다.



Man of Steel - 잡썰

  [1] 조우
  예고편에서부터 보인 영상 질감이 종래의 것들과는 달랐다는 점과, 놀란 감독이 제작자였다는 사실은 스토리의 질감에 대한 어떤 재구성을 예상하게 하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문득 생각난 것은 이 초인이 가졌다는 그 초인성이 애초에 무엇이었느냐는 것, 즉, 이전 시리즈에서 줄곧 그의 존재적 본성인 양 보여 준 그 우호적인 아우라를 벗겨 보면 무엇이 남겠느냐 하는 것이다.

  아주 단순한 것이 남는다. 이 초인은 지구의 문명 진보와 초지구적 창조력과, 유니버스를 관통하는 우주적 지식이나 지혜 등과는 일절 무관한, 문자 그대로 사물의 구조와 질서에 손괴만을 가할 수 있는 무시무시한 능력을 지니고 있다. 전 지구적이고 전 인류적인 규모에 대응하는 살벌한 힘이다. 그의 정신적 도덕적 게이지가 어느 쪽으로 기우느냐에 따라서 선행뿐만 아니라 얼마든지 종말론급의 악행도 거뜬히 해 보일 수 있는 파괴력인 것이다. 지구인들이 그를 경계하는 것도, 구세주로 여기는 것도 다 이 압도적인 힘을 축으로 일어난다. 그리고 문지방을 넘나들듯 초고온 대기권을 넘나드는 그의 육체에 인간들로서는 도저히 구속할 수 없는 자유가 내포되어 있다. 그렇다면 이 우주적 이방인에게 방약무인하게 살 자유가 왜 없겠으며 우리 편이어야 할 이유가 대체 어디 있는가.

  이와 같이 당 영화는 강자에 대한 약자의 경계심을 가정하고 출발한 느낌이 없지 않다. 결국 약자 인류에 대하여 클라크가 어떤 도덕성을 가져야 온당한지에 대한 리부팅인 것이다. 원점으로의 회귀는 초토화 직전의 클립톤성과 그의 부모의 정치적 성향 및 도덕적 성향과 칼엘의 탄생 시점으로까지 회귀한다. 조엘과 라라는 외계 행성 지구를 "희망(S)"으로 보고 독생자를 비행선에 태워 거기로 쏘아 보내고, 조나단 켄트와 마샤 켄트는 하늘에서 내려온 작은 외계 생명체가 사람의 유형적인 형상을 하고 있는 것만으로 대담하게도 아기를 자신들의 아들로 맞이한다. 조엘이 우주선의 목적지가 진정한 '목적'이기를 희망했던 것처럼 그의 목적이 머나먼 우주를 가로질러 켄트 부부의, 악한 의지가 아닌 선한 의지와 조우한 것이다. 당 영화는 칼엘이 켄트 부부의 품에 안긴 이 기적적인 사태야말로 도덕적 수퍼맨 탄생의 진정한 기원이었다고 하는 듯하다. 이리하여 외계적 육체는 지구의 선한 정신과 운명처럼 만나서 일차적인 정신을 구성하며 자라고, 커서는 칼엘로서의 이차적 자아와 조엘의 우주적 정치관을 받아들인다. 이로써 영화는 우주적 동질성을 강조하여, 조드 일당의 공격에 대하여 클라크가 지구 시민으로서 판단하는 것이 결단코 편협한 행성적 도덕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고 할 우주적 도덕 지평을 마련한다.

  [2] 투시
  클라크의 투시는 시야의 통상적인 각도를 따르는 것으로 보인다. 투시 방향이 동공의 방향을 정확하게 직향적으로 따르므로 시계의 폭 자체는 360˚와 같이 초인적이지 않다. 뒤돌아보지 않고서도 자신의 뒤통수 너머로 투시할 수 있다면 더 재미있었을 텐데 말이다. 게다가 장해물을 장해물로 보지 않는 이 투시 능력은 외부를 향하는 엄청난 공간 초월적 시각인 데 반하여 그의 내적 지각이나 내성 능력 및 추론 능력은 비교적 평범하고 보통 인간의 수준과 별반 다를 바 없어 보인다. 설령 매우 좋다는 설정이 있다 한들 아인슈타인의 지적 수준, 이 인간적인 한계를 넘을 것 같지는 않다. 시각적 정보량이 인간의 경우보다 더 많다 뿐이지 그의 머리가 초인적으로 순식간에 고차 방정식을 생산해낼 것 같지는 않다는 말이다. 그러면 시력이 좋다고 머리까지 좋아야 하냐고 되물을 수 있다. 그렇다면 그는 부분적으로만 초인적이라 해야 맞다. 이 같은 비대칭성에서 그의 외형 말고도 그의 정신에서 인간적이라 할 IQ를 찾고, 그것이 그와 인간의 공통분모라는 것을 그런 반쪽짜리 반신반인의 아날로지로 정리할 생각이라면 말이다. 인간에 대한 지나친 애착으로 그의 멘탈이 쉽게 비실비실해지는 만큼이나 악당의 속임수에도 쉽게 빠지는 것은 머리가 나빠서가 아니라 너무나 인간적이어서 그런 거라고.

  어쨌든 투시는 당 영화에서 일단 부작용으로 취급되며 소개된다. 통상은 안 보일 저런 것이 보이기 시작하면 정신 위생에 얼마나 나쁘겠느냐는 것인데, 클라크도 안 보이는 것은 보여서는 안 되는 것이라고 알게 모르게 배웠기 때문이다. 이 능력에 눈뜬 소년이 제2차 성징기를 어떻게 보냈을까를 생각하면, 아마도 남 몰래 여학생들의 알몸에 점수를 매기고 다녔을 것이라는 정도는 쉬이 추측할 수 있다. 그러나 그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는, 그 얼마나 건전한 외계인인지는 우리 모두가 기꺼이 수용하는 고정관념이다. 기실 저 노골적인 장면은 소년이 겪는 시각적 수난에 집중되어 있고 그 해부학적인 혐오만을 의도한다. 로이스 레인의 상처를 확인할 때와 같이 사정상 꼭 필요할 때가 아니면 사심으로 투시하지 않는 그의 인성적 계기를 보여 주는 것이 이 장면에서 읽어 낼 수 있는 영화적 의미라 할 수 있는데, 그가 조리개 조절하듯 투시력을 조절하여 재미 삼아 꿰뚫어 보아서는 안 되는 지점을 환유적으로 유년 시절의 트라우마에 직결시킨 것이다. 다 이유가 있어서 이런 장면을 넣었던 게다. 위기로부터 자신들을 구해 주는 것까지는 좋다마는, 지구의 여성 시민들이 초인의 시선을 마주할 때마다 자신들의 유방과 성기에 신경이 가게 된다면 이 또한 얼마나 부담스러운 초인이겠는가.

클라크 & 랄프

  [3] 속도와 수명
  클라크는 광속으로 난다고도 하는데 여하튼 초고속으로 날아다닌다. 랄프 힌클리("위대한 영웅")의 느리고 서투른 활공 능력만 보아도, 클라크의 경우는 저공 비행 중 근접하는 공간에 대한 정보 캣치가 빨라도 보통 빠른 게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점은, 그렇게 날면서 엄청난 속도로 전방 시계를 압박하며 지나가는 광경의 순간적인 광학적 변화율에 그의 비행 운동이 원활하게 커플링되고 있다는 의미를 포함할 것이다. 비행기처럼 소정의 항로를 따라 날거나 로켓처럼 매번 장해물이 없는 하늘로 수직 이륙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 한, 진행 방향을 지향하는 지각적 예상도 무지무지하게 빨라야 되고 그 예상 범위 또한 무지무지하게 넓어야 가능하다는 의미다. 안 그랬다가는 이 빌딩 저 빌딩에다 헤딩하고 다니는 일이 속출하게 된다(랄프는 기차에 꼴아박고 기억 상실증까지 걸렸었다).

  그러나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개체의 수명이 개체 사이즈에 어느 정도 비례한다 하고 또 개미의 보행 속도가 사람으로 치면 시속 90km 이상이라는 얄궂은 소문이 있던데, 스피드가 이같이 인생 길이와 유관하다면, 우리에게 1초의 시간이 클라크에게 혹시 수백 초쯤은 되지나 않는지. 혹 그렇다면, 신적인 권능을 가지고도 외형적 성장 발육 및 노화 현상이 어찌하여 저리도 인간과 다를 바 없는가가 중요하다. 즉, 우리가 몰라서 그렇지, 그가 혹시 인간과는 차원이 다른 시간 속에서 사는 것이 아닌가. 일광욕으로 모종의 파워를 얻어 행하는 악당 퇴치 및 인명 구조 작업 외에도 광속으로 어딘가를 열나게 왔다 갔다 하면서, 사실은 남모를 짓을 하고 사는 게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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